(영화의 결정적인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거나 내용을 알고 싶지 않은 분은 읽지 마세요)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본능적으로 느껴 봐" 왕 형사의 실종과 관련 있는 세 건의 무장 강도를 직감으로 재연하던 번 형사 (유청운) 는 호 형사 (안지걸) 에게 이렇게 말한다. 경찰 내부에서 '신탐 (神探)' 으로 알려진 번 형사의 수사방식은 이런 식이다. 하나하나 증거를 수집하고 치밀하게 사건을 재구성하기 보다는 대략적인 정보를 취하고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에서 체험을 하고 그를 통해 얻어낸 직감만을 믿는다. 그게 신기하게도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번 형사의 본능에 걸려드는 인물이 왕 형사의 파트너였던 치와이 (임가동) 다. 번 형사의 또 다른 능력 역시 어떤 이유로든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원래부터 번 형사는 그렇게 생겨 먹었다, 로 끝이다. 영화 <매드 디텍티브 - 神探: Mad Detective, 2007> 는 시종일관 그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번 형사의 또 다른 능력이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내면, 즉 한 가지로 규정될 수 없는 여러 개의 마음들이 고스란히 보인다는 것이다. 흔히 애니메이션과 시트콤에서 반복되는 설정이라고 생각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주인공 앞에 천사와 악마가 교대로 등장하여 충동질을 하는 장면들처럼, 번 형사의 눈에는 왕 형사 실종 사건의 강력한 용의자 치와이 주변에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일 곱 개의 마음들이 어슬렁대며, 호 형사는 겁 많고 나약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심지어 치와이의 여러 자아중 하나는 "우리가 보이나봐" 라며 번 형사에게 중얼대기까지 한다. 그런데 과연 이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들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초자연적인 현상은 번 형사의 모든 걸 뒤죽박죽 엉클어 놓는다. 어차피 세상은 거기서 거기다. "내가 이기적으로 보여. 모든 인간은 다 그래" 라고 말하는 이혼한 아내의 말처럼, 적당히 이기적이고 위악적인 세상에서 타인의 내면을 속속들이 아는 건 미친 짓이다. 아니, 미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번 형사는 퇴직하는 상사에게 존경의 표시로 귀를 잘라 준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경찰이라는 조직에서 쫓겨난다. 그를 견디다 못해 이혼했을 법한 아내는 환상 속에서만 진심으로 걱정하고 보듬어 안는다. 번 형사에게 현실은 차라리 끔찍한 지옥에 가깝다.
모든 것은 총을 잃어버리면서 시작한다. 경찰에게 총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두기봉의 전작인 <PTU, 2003> 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다. <매드 디텍티브> 는 '잃어버린 총' 이라는 소재를 적극적으로 차용한다는 점에서 <PTU> 의 배다른 형제 같은데, <PTU> 에서 총을 잃어버린 형사로 나오는 임설은 이 영화에서 치와이의 여러 자아 중 하나로 출연하기도 한다. 임무 도중 총을 잃어버리게 된 치와이는 번 형사가 말하는 것처럼 보기 드문 다중 인격이라기보다 평소에는 감춰져있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욕망과 두려움, 그에 대한 자기합리화의 집합체에 가깝다. 어떻게 보면 번 형사가 아내의 긍정적인 모습만을 따로 떼어내어 환상을 만들어낸다거나 호 형사가 극한 처지에 몰리게 되는 상황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다. 치와이가 인도인을 추격하던 도중 총을 잃어버리고 왕 형사를 죽이게 되는 과정은 우발적이었으며 그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 각각 치와이의 내면을 상징하는 일 곱 명의 인물들 (중에 서 너 명은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다) 은 나약하고 폭력적이고 영악한 모습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번 형사와 치와이의 내면은 잘게 조각나 겹쳐진다. 거기에 호 형사도 동참하며 셋은 거의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더 위태로운 쪽은 선과 악, 환상과 실재에서 상처받고 자살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는 번 형사다.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이 총을 겨누면서 물고 물리는 결말은 예상대로 어둡기 짝이 없지만 그와 상관없이 근사한 쾌감까지 느껴진다. 그들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지만 누구 하나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인도인은 치와이가 잃어버린 총을 가지고 있고 치와이는 죽은 왕 형사의 총을 자신의 것으로 위장했으며, 또한 번 형사는 호 형사에게 빼앗은 총을, 호 형사는 애인이자 동료인 지지에게서 빌린 총을 손에 쥐고 있다. 뒤바뀐 총과 깨어진 거울이라는 구체적인 도구를 이용하는 결말은 복잡다단한 인간만사를 굵직하고 섬세한 필체를 오가면서 써내려간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대사는 번 형사의 직감을 따라가다 보면 근사한 결말에 이르게 되는 <매드 디텍티브> 를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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