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극의 칼 (刀; The Blade, 1995)
감독 : 서극
각본 : 서극, 허안
주연 : 조문탁, 혜천사, 웅흔흔, 상니, 종벽하, 주가령, 진호
김용의 <신조협려>에서 장철의 <외팔이>로 이어지던 팔 한 쪽으로 복수를 단행하는 검객 이야기는 <서극의 칼(刀)>로 이어진다. 기본적인 모티브 - 사부의 딸에 의해 팔 한 쪽 잃게 되는 검객 - 는 그대로이지만, 서극은 여러가지 변화를 만들어낸다.
1. 서극의 강호
<서극의 칼(刀)>은 한 소녀(사부의 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소녀의 강호 이야기는 서극이 말하고자 하는 강호가 어떤 모습인지를 잘 드러낸다.
강호라... 강호가 뭔지 난 모른다.
난 그저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이사다닌 수많은 지역을 알고 있을 뿐이다. 쉴새없이 이곳에서 저것으로 옮겨 다녔지만 아버지는 내게 이유를 설명해준 적이 없다. 아버지가 내게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는, 모두 거래와 관련된 것이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행위는 거래의 일종이라 하셨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 팔고 싶은 게 있을 때에도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그렇지만 난 뭐가 갖고 팔고인지, 뭐가 대가인지,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늘 '정의(正義)'란 동정(同情)일 뿐 시비(是非)의 구분이 없다고 하셨다. 오늘 옳지않은 어떤 상황을 보고 끼어들어도, 내일이 오면 틀린 건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된다고. 그때 후회해봤자 이미 너무 늦다고. 자신의 책임일 뿐이라고.
서극의 강호는 서로 통성명을 하고 검술을 주고 받고 도가 횡횡하는 공간이 아니다. 서극의 강호에는 초식을 전개하며 내지르는 초식 이름도 없고 싸움 뒤의 호형호제 하는 술자리도 없다. 흙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치는 황폐한 이 곳은 '내가 이기지 않으면 곧 죽음'인 생존의 강호다.
마치 서부영화의 배경처럼, 이 황폐한 땅에는 마적떼가 출몰해 마을사람을 괴롭히고 심지어 화상까지 죽이는 악행을 저지른다. 제련소에 칼을 만드는 기술자인 주인공과 그의 동료들이 화상의 죽음에 분개하며 행동하려 할 때, 제련소란 작은 세상의 주인인 사부는 모른체 할 것을 강요한다. 사부가 아는 강호란 대가를 치뤄야 하는 곳 - 저 대사를 듣자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등가교환' 이론이 떠올랐다 - 이고 섣불리 행동할 수 없는 곳이지만 어린 제자들의 생각은 사부와 다르다. 그러나 이 작은 강호 속에 머무르던, 살해당한 아버지의 실상을 알게 된 주인공인 조문탁은 소녀 때문에 한쪽 팔을 잃는다. 불구의 몸으로 강호에 나온 조문탁은 이제 병신 소리를 들으며 한쪽 팔로 일해야 하고 눈 앞에 있는 아버지의 원수를 알아보고도 행동할 수 없다. 이렇게 서극은 현실인 강호를 펼쳐보인다.
2. 서극의 강호인
제련소란 작은 강호에 머무르는 소녀는 자신의 강호가 "두 남자"라고 말한다. 소녀는 바깥의 강호를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두 남자 중 한 명이 팔을 잃고 강호에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을 때 소녀는 여전히 자신만의 환상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남들이 죽었다고 해도 인정하지 않는 소녀는 철두란 다른 한 남자와 함께 조문탁을 찾아 나섰다가 유곽의 여자 주가령을 만난다. 유곽이란 작은 강호를 떠나 죽음이 그림자처럼 공존하는 강호로 나온 주가령은 목숨을 댓가로 자유를 얻는다. 원수인 웅흔흔은 돈을 댓가로 받기 위해 남의 목숨을 뺏는다. 조문탁은 팔을 댓가로 내놓은 후 강호로 나와 무공을 연마하고 아버지의 원수와 드디어 '마주' 선다.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입'으로 말한다.
모두가 댓가를 치루며 강호에서 뒹굴 때, 소녀만이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강호에 머무른다, 환상 속에서 늙어간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강호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다시 돌라올 리가 없다. 순간 서극은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 현실의 강호로 떠난 인물들을 보여주는 대신, 다시 제련소의 소녀로 카메라를 돌려 환상 속에서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를 끝낸다.
그 순간 난 깨달았다. 강호의 거래에서 당신이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건 일시적인 이익일 뿐이라는 걸, 상대가 어느날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가져갈 수 있고 혹 실패하더라도 그의 후인(後人)이 다시 가져간다는 걸. 그러니 설사 내가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더라도 나 역시 정안(조문탁)처럼 돌아와서 복수하리란 걸.
정안이 떠났다....철두도 가버렸다......왜 떠난 거지? 뭐하러 왔던 거야? 우리가 있는데? 어째서.....
난 더이상 그들을 찾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둘은 날 찾아올 거다. 해마다 그렇게 그들은 변함없었다. 그들은 웃는 얼굴은 걱정스러웠지만 찬란한 미소였다.
그들은 와도 오래 머무리지 않았다. 그러나 초조하지 않다. 내가 계속 기다리다보면 다음번에는 그들이 오래 있을테니까.
강호가 뭔지 난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나 내 알바 아니다. 그저 날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날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3. 서극의 칼
영화에서 중요한 건 결국 칼(刀)이다. 서극이 이런 액션을 구현해보고 싶어서 무기를 칼(刀)로 선택했는지, 칼(刀)을 구현해보고 싶어서 내용을 이렇게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칼(刀)은 무겁고 검보다 짧다, 게다가 조문탁은 아버지의 유품인 부러진 칼(刀)을 이용하기 때문에 다른 칼(刀)보다 더 짧다. 때문에 상대방을 헤하려면 다른 무기에 비해 더 가깝게 다가가야 위협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접근하려는 조문탁을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결국 칼(刀)의 속도가 여타 무협물보다 훨씬 빨라야 한다. 또 칼(刀)은 검처럼 찌르는 무기가 아니다. 그 무게와 크기를 감안하면 베는 게 맞다. 검처럼 나비처럼 날와아 찌르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거운 칼(刀)이 움직이며 칼(刀) 자체의 무게와 사용하는 조문탁의 무게가 합쳐져 관객으로 하여금 저거에 살짝 맞아도 뼈 몇 개 부러지는 게 당연하리라는, 무서운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 무기다. 이 무거운 걸 조문탁은 한 팔로 다뤄야 하니 비극은 배가 되는 거다.
서극은 이런 속도와 압박감을 동시에 화면으로 구현해낸다.
<서극의 칼 (刀; The Blade, 1995)>을 평하는 말로, 조문탁과 마지막 결투를 펼쳤던 웅흔흔의 말처럼 정확한 건 없다.
"나는 [도]가 지난 10년간 최고의 액션 영화라고 생각한다.설정, 캐릭터, 액션 장면 모두가 대단히 독특하다.특히 액션의 타격감은 강렬한 압박을 보여주면서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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