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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완령옥 - 阮玲玉: Centre Stage,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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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금붕 감독의 <완령옥 - 阮玲玉: Centre Stage, 1991> 은 1930년대 중국 영화의 전설적인 스타였던 '완령옥' 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흔한 전기 영화가 아니다. 그의 일대기를 보여주지도 않을뿐더러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빠지기 쉬운 감동적인 일화와도 거리가 멀다. 어차피 그건 관금붕의 몫은 아니었을 것이다. 과거의 배우를 다시 불러내는 작업은 완령옥의 애인이었던 장달민을 연기한 배우와 관금붕의 입을 통해서도 드러나듯이, 완령옥이 배우로서 최절정에 이른 순간에 자살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한때 대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던 배우가 순식간에 천박한 여자로 낙인찍혀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결국은 자살하기까지의 역정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관금붕 감독과 장만옥이 완령옥이라는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작한다. 완령옥은 16살에 영화에 데뷔했지만 처음부터 스타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다 '손유' 라는 감독의 눈에 띄어 연화영화사에서 제작한 <고도춘몽> 과 <야초한화> 에 출연을 하게 된다. 그녀가 출연했던 대부분의 영화들은 가난 때문에 고통을 받는 역할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극하는 연기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다. 완령옥은 거의 중국 최초의 무비스타였다.


   관금붕은 장만옥이 연기하는 30년대의 완령옥을 보여주다 느닷없이 현재로 돌아와서는 완령옥에 대해 이야기 한다. 완령옥의 내면에 다가가는 드라마가 이어지고 장만옥의 보석 같은 연기 (장만옥은 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에 감탄스러워 질 때면 어김없이 흑백화면의 인터뷰가 끼어든다. 이야기와 질문은 다른 배우에게 넘어가고 다시 관금붕으로 이어진다. 감독과 배우가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실존 인물의 인터뷰와 자료화면이 삽입되는 장면은 계속 반복된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영화적 기법은 <완령옥> 을 지탱하는 독특한 지점이자 출연했던 영화와 현실이 겹치는 완령옥의 비극적인 삶을 직설적으로 나타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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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령옥을 자살로 몰고 간 이유는 스캔들 때문이었다. 그녀가 출연한 <신여성> 은 병든 딸을 위해 창녀가 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페미니즘 계열의 영화였는데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다 자살에 이르게 하는 사람은 악덕한 남자와 잡지사 기자들이었다. 영화를 본 기자들은 자신들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는 장면을 삭제하고 사과하기를 요구한다. 감독인 채초생 (양가휘) 은 이를 수용하려 하지만 완령옥이 거부하자 기자들은 완령옥의 사생활을 들춰내기 시작한다. 당시 완령옥은 남편이었던 장달민 (오계화) 과 헤어지고 유부남인 당계산 (진한) 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이를 물고 늘어지고 장달민은 돈에 홀려 완령옥의 사생활을 언론에 판다. 하루아침에 완령옥은 대중의 스타에서 가정을 파괴한 파렴치한 여자로 손가락질 받게 된다.


   그러나 스캔들 이면에는 좀 더 복잡한 시대적 상황이 있다. 영화에서는 짧게 언급이 되고 말지만, 당시의 중국은 외부적으로 일본의 침략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고 내부적으론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나뉘어 대립과 갈등이 고조에 달하던 시기였다. 국민당은 나날이 무능하고 부패해져갔지만 공산당은 소작농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더욱 더 세력을 넓혀간다. 그런 격변이 영화계라고 예외일리는 없다. 1930년대의 상하이는 중국영화의 중심이자 진보적인 사상이 널리 퍼진 곳이기도 했다. 신식 교육을 받은 젊은 영화인들은 공산당을 지지하는 좌파 성향이 많았는데 완령옥의 거의 모든 영화를 제작하면서 중국영화의 한 흐름을 이끌었던 '연화영화사' 도 마찬가지였다. <신여성> 을 연출한 채초생과 각본을 쓴 작가도 그러했다. 특히 채초생은 평생을 좌파로 살았던 사람이다. 국민당은 기자를 앞세워 어떻게 비도덕적인 여자가 신여성을 연기할 수 있냐고 완령옥의 사생활을 까발린다. 국민당에게 완령옥의 문란해 보이는 애정행각은 눈엣 가시 같은 반대파들을 공격하기 위한 좋은 빌미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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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그런 객관적 사실과 토론, 상상과 재연으로 채워진다. 관금붕은 장만옥에게 완령옥이 연기했던 배역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연기가 필요 없는 장식적인 역할만 하다 나중에야 그만의 매력을 갖춘 배우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장만옥은 "저랑 많이 비슷하지 않나요" 라는 반응을 보인다. 완령옥을 대하는 장만옥의 시선은 호기심과 어떤 연대감이 적당히 섞인 것으로 보이지만 촬영을 거듭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두 배우는 구분할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른다. 사실에 근거한 허구와 현실의 경계도 갈수록 사라진다. <신여성> 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던 30년대의 세트장은 어느새 완령옥에 대한 영화를 찍고 있는 현실의 공간이 된다.


   완령옥이 자살하기 직전 영화사 사람들과 가진 저녁식사와 장례식이 교차하는 후반부에 이르면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완령옥이 관에 누워있는가 싶더니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는 관금붕이 등장하고 장만옥이 숨을 쉬었다며 컷을 외친다. 다음 촬영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한 배우가 완령옥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다시 장만옥은 숨을 참으면서 누워있고 긴 침묵의 테이크가 이어지면서 실제 완령옥의 시신 사진과 장만옥의 참고 참았던 숨이 겹쳐진다.


   완령옥은 원하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누구보다 적극적이었고 그가 연기한 배역들은 강하고 독립적인 새로운 여성상이었지만 결국 사회의 거대한 힘에 부딪혀 좌절 (자살) 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건 전통과 근대 사이에 놓인 그녀 (여성) 에게 닥친 비극적인 현실이기도 했다. 관금붕은 장만옥에게 질문을 던진다. "만약 당신이 같은 일을 겪는다면 어떡하겠어?" <완령옥> 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허물고 거울과 창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완령옥과 장만옥이라는 배우를 겹쳐놓는다. 과거를 경유해 영화와 현실을 바라보는 <완령옥> 은 또한 "난 정말 좋은 사람인가요?" 라고 되묻던 그의 유서와도 같은 질문에 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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