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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타이완 블랙 무비를 말하다 (臺灣黑電影; Taiwan Black Movies, 2005)

타이완 블랙 무비를 말하다 (臺灣黑電影; Taiwan Black Movies, 2005)

감독 : 후계연

출연 : 천보원, 왕총광
 

  [타이완 블랙 무비를 말하다]는 1970년대 말부터 타이완에서 크게 유행한 소위 사회영화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사회영화라는 명칭이 붙긴 했지만 이 영화들은 사실 범죄와 폭력을 다룬 B무비였는데, 그 시초는 1979년 제작된 구양준 감독의 [착오적제일보 錯誤的第一步]였다. [착오적제일보]는 한 범죄자가 자신의 범행을 뉘우치면서 시작하는데, 영화는 왜 이 남자가 타락하게 됐는지를 파고들고 있으며, 창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등의 범행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착오적제일보]의 성공으로 타이완에 현실주의 영화, 즉 범죄영화의 열풍이 불어 이후 수년 동안 100여 편이 넘는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구양준 감독은 [착오적제일보]를 만들고 나서 경찰청에 불려갔는데 당시 타이완 경찰청은 우리나라의 과거 안기부에 비교될 정도로 무서운 곳이었다고 한다. 그는 경찰청에서 왜 감옥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는지 질문을 받았고([착오적제일보]에는 당시 타이완 영화에서는 최초로 수감자의 발에 채우는 족쇄가 등장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경찰청의 주요 인사로부터 이 정도로 만든 것은 괜찮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타이완은 거센 정치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바깥으로는 UN에서 퇴출되는 등 국제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고, 내적으로는 민주화 요구와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움직임 사이에 심한 갈등이 벌어졌다. 반대로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으므로,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한 인사의 표현에 따르면 이 시기는 가장 좋은 시대이자 가장 나쁜 시대였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억눌린 감정을 발산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욕구는 영화 제작자들로 하여금 자극적인 영화를 만들도록 했다. 그때까지 타이완 사회는 순박하고 보수적인 분위기였으며, 뉴스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시나리오 작가들은 실제 사건을 근거로 시나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풍광여살성 瘋狂女煞星](1981), [상하이 사회 파일 上海社會檔案](1981) 등이다. 또한 제작자들은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에 선정성을 결합시켜서 영화를 흥행시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상흔문학을 소재로 한 어떤 반공영화는 그 흥행의 이유가 대여섯 번에 걸친 여성의 유두 노출이었다든가, [상하이 사회 파일]의 부제가 [소녀의 초야권]이었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당시 관객들에게는 타이완 영화는 뻔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여성의 노출과 쿵푸 장면이 있어서 보러 간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정권은 영화가 비록 선정적이라도 반공적인 영화라면 눈감아주었고, 소위 말하는 3S 정책과 비슷한 취지의 정책이 영화계에도 적용되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선정적인 영화로 빠져나가도록 부추긴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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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는 당시 제작 환경 등을 전해주는 일련의 에피소드를 말해주는데, 당시 만들어진 어떤 영화의 경우 감독에게 주어진 것은 주인공이 사회영화의 대스타였던 육소분이라는 것과 개봉일 뿐이었다. 육소분을 데리고 정해진 기간 안에 당시 인기를 끌던 사회영화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감독은 시나리오를 그날그날 써가면서 20일 만에 영화를 완성시켰고, 이 영화는 다행히도 꽤 흥행했다고 한다. 당시 영화계와 깡패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도 흥미로운데, 그때 사회영화가 꽤 흥행하던 시절이라 별별 사람들이 다 영화판에 뛰어들었고, 그 중에는 깡패들도 있었다. 그때는 스타를 캐스팅하려면 반드시 깡패들과 협의를 해야 했다. 감독이 촬영장에서 깡패들에게 쫓겨 달아나는 일도 흔했고, 소위 촬영부대라는 것도 있었다. 깡패들이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영화를 찍는 것을 보면 우루루 내려서 그 영화의 엑스트라나 조연 배우로 출연하는 것이다. 만약에 거부하면 촬영장이 피바다가 될 각오를 해야 했다. 깡패들은 그렇게 영화에 출연하고 한사람 당 5천 위안씩을 받아갔다고 한다. 1982년에는 사회영화의 열풍에 이어 도박 영화가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인터뷰어의 입을 빌어 그때 타이완 영화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당시 영화 검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타이완 정부의 사전 검열은 매우 혹독한 수준이었는데, 사전 검열을 위한 상영회가 존재했다. 각계 유명 인사들로 구성된 검열위원들이 영화를 보다 문제가 될만한 장면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벨을 누르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영사기사가 종이 같은 것을 문제가 된 부분의 필름에 끼워 놓았는데, 영화 상영이 끝나고 보면 필름이 종잇조각으로 빼곡했다고 한다. 검열 때문에 해외 판본과 타이완 국내 판본이 다른 경우가 많았고, 삭제한 필름을 보관해뒀다가 다시 붙여서 몰래 상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애국과 반공이라는 주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에로틱하거나 폭력적인 영화의 보호막이 되었다.

  사회영화가 명색이 사회라는 말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회영화에는 타이완의 흔적이 없었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비단 사회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타이완 영화에 전반적으로 적용되는 것들이다. 당시 타이완 영화는 동남아에 대부분 선판매되었기 때문에 타이완적인 요소를 빼는 것이 해외에서의 흥행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검열. 검열은 타이완의 특색, 타이완이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요소를 영화에서 지워버렸다. 당시 사회영화는 겉으로는 타이완 사회를 잘 설명해준 것 같지만 검열에 의해서 이런 요소들은 실제로는 거세되었고, 남은 것은 선정성뿐이었다. 사회영화들은 사회에서 밀려나고 상처 입은 주인공들을 등장시켰지만 이들이 사회에서 왜 밀려났는가, 왜 상처를 입었는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그 원인을 지극히 단순화시켰다. 한 인터뷰어는 진정한 사회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착오적제일보]와 [새벽 6시의 총성 凌晨六點槍聲](1979)뿐이라고 말한다. 소위 사회영화들이 다룬 사회 현상은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 아니었고, 전에 볼 수 없었던 폭력이나 조폭 등의 소재를 등장시킨 것이었을 뿐이었으므로 결국 새로운 장르로 대체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회영화들에 담긴 페미니즘 요소이다. 사회영화들 중에는 남성에게 처절하게 강간당하고 그 복수를 실행하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많았는데, 이는 당시 증가하는 여성의 사회참여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우려와 불안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많은 영화가 나오다보니, 그 중에서는 형식적으로 새로운 실험을 한 영화들도 간혹 생겨났는데, 예를 들어 [신용여살성 神勇女煞星](1982) 같은 영화에는 네거티브 필름을 사용한 장면이 있었다(인터뷰를 한 감독은 [신용여살성]을 굉장히 참신한 영화로 묘사하는데, 이 영화는 아벨 페라라 감독의 [복수의 립스틱]과 내용면에서 거의 흡사한 것으로 보인다. 둘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서 나온 영화라 어느 쪽이 어느 쪽의 영향을 받았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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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적으로 당시 타이완에서는 영화에 현실을 담아낼 방법이 없었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할 때 영화는 도피하거나, 관객들을 선정적으로 자극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소위 사회영화라 불리는 블랙 무비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큐멘터리는 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 좌파의 독서회 조직, 따이광화 사건, 린이슝 일가 몰살사건 등 당시에 일어났던 유명한 정치 사회적 사건들을 거론하고 있다. 타이완 영화들은 사회는 물론 정치도 건드릴 수 없었다.

 
사회영화가 타이완 영화에 궁극적으로 미친 영향은, 이 영화들이 그때까지 타이완 영화계를 이끌어왔던 영화 제작 시스템의 몰락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사회영화처럼 빠른 시간 안에 찍어내는 값싼 영화들은 영화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일정한 일거리를 줌으로써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하며 제작 시스템을 돌아가게 했다. 결과적으로 사회영화의 출현은 소위 말하는 타이완 뉴웨이브 영화 탄생에 공헌하게 되었는데, 타이완 뉴웨이브 영화는 작가 영화였고, 개인적 창작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