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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두기봉 감독 마스터클래스



10월 9일 오후 3시 부산 그랜드호텔 스카이홀에서 '나의 인생, 나의 영화'라는 주제로 두기봉 감독의 마스터클래스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두기봉 감독이 자신의 30년 영화인생을 9개의 챕터로 나눠 이야기하고 챕터가 끝날 때마다 관객들의 질문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복수] GV와 마찬가지로 오승욱 감독이 참석. 이번 마스터클래스를 요약 정리한 글은 부산국제영화제 데일리에 수록되었으며 이 글은 그보다는 좀 더 길고 약간 부정확한 곳이 있을 수 있다.
질문들이 여러 가지 나왔으나 다 정리하지는 못했고 대략 챕터 밑에 괄호를 쳐서 질문과 그 답변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적어 놓았다. 시점은 1인칭인지 3인칭인지... 알아서들 읽어 주시길.

1. 두기봉 감독은 어떻게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나? 두기봉 감독은 공부와 맞지 않아서 우리 때로 치면 중학교 과정에서 학교를 그만 뒀다. 일자리를 구하다가 홍콩 TVB 방송국에 들어가서 잡일을 하게 되었다. 편지 같은 것을 전해주는 일이었다. 그가 첫번째로 하게 된 일이었다. 두기봉 감독은 이후 전화국에서 일한 적도 있고 축구를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가장 좋아하고 또 잘 맞았던 일은 TVB에서의 일이었다. 금요일에 일이 끝나고 가장 행복했던 것은 일 끝나고 영화를 보거나 TV 드라마를 보는 것이었다. TVB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는 영화가 배우의 연기와 각본 등이 잘 짜여져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몰랐다. TVB에 들어가서 그가 한 일은 가장 낮은 지위의 일이었고 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은 있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이루기 힘든 일이었다.
그 후 기회가 되어 두기봉 감독은 TVB 연기자 훈련반에 들어가서 감독이 되기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것을 배우게 됐다. 배우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열심히 해서 성적도 괜찮았고 무사히 졸업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 두기봉 감독에게 어린 시절 인상깊었던 헐리우드 영화에 대해 질문했는데 두기봉 감독은 어릴 때 인상깊게 본 영화가 있지만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서부극이나 로마 시대극, 전쟁 영화 등이 두기봉 영화의 노스탤지어)

2. 두기봉 감독은 연기자 훈련반에서 영화와 드라마 제작과정을 배우게 되었다. 낮에 일을 하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는 연기자 훈련반 교육을 받는 만만치 않은 일정이었다. 그는 연기자 훈련반을 졸업한 후 조감독이 되지 못한다면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학력이 고졸에 미치지 못했고, 당시에는 감독이 되려면 고졸 이상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조감독이 되었을 때도 두기봉 감독의 급료는 다른 사람들보다 낮았다. 두기봉 감독은 조감독으로 4년을 고생하고 나서야 감독이 될 수 있었다.
두기봉 감독은 1977년 TVB의 프로듀서가 되었다. 그때서야 이 일이 앞으로도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학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노력했고 가장 열심히 일할 때는 1주일 동안 쉬는 날이 없었다. 가장 열심히 일했을 때는 한 달에 마흔 시간 밖에 못 잔 적도 있었다. 힘들었지만 제작현장에서 보내는 시간, 스탭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했기 때문에 그리 괴롭지는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당시에는 드라마 중에서 액션물이 많았기 때문에 두기봉 감독도 자연히 액션물을 찍게 되었다.
(재능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당시 고민하던 것들 중에서 재능에 대한 것은 없었다고 한다. 낮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각본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당시에는 위에서 주는 각본으로 그대로 찍었다고 한다. 전문 음악 프로듀서 같은 것도 없어서 드라마에 필요한 음악 같은 것도 스스로 다 해결해야했다. TV 프로듀서 시절 가장 보람되고 중요했던 것은 양질의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두기봉 감독은 TVB에서 첫번째 연출을 맡았을 때는 너무 긴장해서 손이 땀이 찰 정도였다고 한다. 서극과 임영동은 관련 분야를 공부한 사람들이라 그에게 도움을 많이 줬다고 이야기한다)

3. 두기봉 감독의 첫번째 장편 영화는 [벽수한산탈명금]이었다. 두기봉 감독은 자신이 조감독으로 4년을 투자했으니만큼 꼭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했고 1978년 [벽수한산탈명금]을 연출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와 드라마의 제작환경은 다르다. 두기봉 감독은 첫 영화를 연출하면서 영화제작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게 됐다. 23세에 첫 작품을 연출했지만 그는 부족함을 느꼇고, 첫번째 영화를 연출한 것은 영화 연출에 대해 다시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훌륭한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창작에 대해 많은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두기봉 감독은 첫 영화를 찍을 때 너무 고생해서 7년간 영화를 못 찍었다고 말한다. 방송국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은 영화를 만들까 고민하게 되었다.
(홍콩에서 TV 감독은 창작을 담당하는 총책임자가 아니다. TV 드라마의 총괄 책임이라는 위치를 맡는 자리는 총프로듀서다. 이것이 홍콩 드라마의 특징이다. 방송국에서의 경험이 기교나 기술을 배우는 데에는 도움이 됐지만 창의성이라는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지금도 홍콩 드라마의 제작 시스템은 마찬가지다. 드라마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감독이 모든 부분을 총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방송국 시절 기교를 배웠을 때 이정도면 문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찍을 때 보니 기교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독의 비전이라고 두기봉 감독은 이야기한다. 같은 장면이라도 세 명의 감독이 각각 다르게 표현한다.
첫번째 영화를 찍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이제 영화 감독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TV로 돌아갔다. 돌아가서도 당신은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말을 들었고, 감독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각본 같은 것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영화를 찍었을 때의 교훈은 드라마 제작에도 도움이 되어 이전보다 대담하게 연출할 수 있었다. 그 7년간 두기봉 감독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꿔나갈 수 있었다. 방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청률 높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었다.
드라마 [신조협려]에 대한 질문도 있었는데, [1984 신조협려]는 왕천림 감독이 연출했고 자신이 연출한 것은 [사조영웅문]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당시 왕천림 감독은 총프로듀서 역할을 하던 시기였다고 말한다)

4. 1978년 첫 영화를 찍고 방송국으로 복귀하기는 했으나 기회가 있으면 다른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기도 했다. 그렇게 연출을 하다가 첫 영화를 찍은지 7년쯤 됐을 때 다시 영화 연출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두번째 영화를 찍기로 하면서야 두기봉 감독은 내가 영화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비로소 영화로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를 찍을 때의 제작환경은 제작기간이나 예산을 넘기지 않고 흥행 성적만 된다면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것이었다.
두번째 영화를 찍으려고 들어간 곳이 시네마시티였다. 당시 홍콩 영화계는 상업성을 중시했고 시네마시티도 그런 곳이었다. 시네마시티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두기봉 감독이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는 뜻이었다. 두기봉 감독은 이곳에서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흥행 성적이 괜찮았다. 하지만 시네마시티의 제작 방침에 따라 상업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영화를 찍어야했는데 세번째로 찍은 영화가 [팔성보희]였고 흥행 성적이 굉장히 좋아서 그 이후 두기봉 감독은 자기 스타일의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5. 세번째 영화의 성공 후 시네마시티에서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당시 시네마시티에서 만드는 영화의 주류는 코미디였다. 코미디가 아닌 영화를 찍고 싶어서 만든게 [우견아랑]이다. 예산이 정도를 넘지 않으면 원하는 영화를 찍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서 찍게 되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의 의견은 이 영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영웅본색]이 흥행 성공을 거둔 이후였기 때문에 영웅이 등장한다는 면에서의 소재의 유사성, 문예물 같은 영화의 성격 등에 의문을 품은 것이었다. 하지만 두기봉 감독 자신에게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망해서 TV 방송국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찍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우견아랑]은 주윤발의 가장 흥행성공한 영화 중 하나였고 두기봉 감독에게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
(누군가 [대사건]의 러시아판 리메이크인 [뉴스메이커스]에 대해 질문했는데 두기봉 감독은 그 영화는 아직 보지 못한 모양이다)

6. 당시 홍콩에서 연기자들의 개런티가 천정부지로 올라가다보니 제작비를 조달하는데 문제가 많았다. 당시 찍었던 영화가 [동방삼협]이었는데 액션 영화를 찍고싶었지만 남자 스타들의 개런티가 너무 비쌌다. 매염방, 장만옥, 양자경 셋을 기용해서 영화를 찍는 게 남자배우 한 명의 개런티와 비슷했다(이 부분을 놓쳤는데 부산국제영화제 데일리 소식지에서는 '영웅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었다'는 문장으로 정리한다). 영화를 찍는 데에는 금전적인 문제 또한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다. [동방삼협]을 기점으로 영화에 대한 시각이 큰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1992년, 1993년 두기봉 감독은 무렵 미래의 영화 스타일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자신의 영화는 스타 중심의 영화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스타일의, 자기만의 품격을 갖춘 영화가 될 것인가.

7. 자신의 영화에 스타가 필요한가의 질문은 지속되어 두기봉 감독은 1995년까지 영화를 찍지 않았다. 3년간의 고민 끝에 자기 스타일의 영화를 찍기로 결심하고 위가휘와 함께 밀키웨이 이미지를 창립했다. 밀키웨이 이미지의 모토는 창작성이었다. 제작사를 설립하고 나서 두기봉 감독은 각본과 주제에 따라 배우를 캐스팅하는 제작 방식을 세웠다. 밀키웨이 이미지를 만든 이후 가장 처음 찍은 영화가 위가휘의 [일개자두적탄생]이었다. 두기봉 감독은 이 영화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흥행에는 신경쓰지 말고 찍고 싶은 걸 찍자고 생각했고 그 이후 밀키웨이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기반으로 찍은 영화가 [암화], [진심영웅], [미션], [양개지능활일개](한국 제명이 캘리포니아?) 등이었다.

8. 밀키웨이 이미지의 배우들은 캐스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다(웃음). 밀키웨이의 배우들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맡은 역을 이해하고 연기하는 배우들, 비정상적인 상황(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영화를 찍어야 하는 상황, 1년에서 심지어 3년까지 영화를 촬영해야 하는 상황)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그런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연기자들이다.
[암화], [진심영웅], [미션]의 흥행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흥행이 되지 않다보니 밀키웨이 이미지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흥행뿐만 아니라 영화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인물의 창의성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등의. 반대로 홍콩 시장에서는 흥행 성적이 나빴지만 유럽 시장에서는 흥행 성적이 좋았던 경우도 있었고, 고품질에다 흥행 성적이 나쁜 영화(웃음)를 만들다보니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방향을 바꿔 흥행을 고려한 영화들을 찍게 되었는데 [암전], [수신남녀], [니딩 유] 같은 영화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밀키웨이 스타일의 [PTU], [익사일] 같은 영화도 찍었으니 밀키웨이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방향을 수정한 것은 아니었다.

9. 개인적으로 두기봉 감독이 자신의 영화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두 가지다. [유도용호방]과 [참새]. 2003년 홍콩의 상황은 경제 위기와 사스 등으로 굉장히 어두웠다. 그래서 1970년대 홍콩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이 영화들에 나오는 건물들은 오래된 전통이 있는 건물들이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대를 아우르는 추억이 담겨 있다. 문제는 홍콩 정부가 부동산 경기 활성화를 위해 오래된 건물들을 부수면서 옛모습을 잃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기봉 감독은 [참새]를 통해 사라져가고 있는 홍콩의 면모를 담았다. 오래된 건물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 문화의 산물이다. 새로운 것은 금방 탄생할 수 있지만 예전의 것은 없어지면 돌아오지 않는다. 시대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고 후대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두기봉의 홍콩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 작품이다.
([유도용호방]의 테이블 씬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시선의 일치를 가장 중시한다는 답변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