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극 감독의 데뷔작 <접변 - 蝶變: The Butterfly Murders, 1979> 은 성에서 벌어진 알 수 없는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그곳에 모인 인물들 간의 암투를 다루는 미스터리의 외양을 띈다. 편의상 미스터리라 정의해 놓았는데 <접변> 을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자면 '무협' 에 속하는 영화다. 얼핏 무협에 미스터리라는 조합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스터리한 탐정 무협소설로 명성을 얻은 고룡의 원작을 바탕으로 인기 TV 시리즈를 만든 경험이 있던 서극에게 <접변> 은 낯설지 않은 작업이자 거의 예정된 운명이었을 것이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TV방송사의 프로듀서로 경력을 쌓아나가던 풋내기 감독의 야심만만한 첫번째 시도는 딱히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매력을 지녔다.
수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상에 흉흉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살인 나비 떼의 공격을 피해 성의 지하로 피신한 성주는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강호에서 세 번째로 명망 높은 문파인 십기단과 줄타기의 고수 녹영 (미설), 혼자 티베트를 유랑하던 학자 (유조명), 전설의 비기를 쓴다고 알려진 천수와 마화 (고웅) 를 비롯한 인물들이 하나둘씩 성으로 모여든다. 그런데 정작 성안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학자와 녹영을 제외하고 나비 떼에겐 별 관심도 없어 보인다. 십기단의 우두머리는 소문과 실재 사이에서 뭔가 기회를 엿보기만 하고 성주는 갑작스레 나비 떼에게 죽임을 당한다. 의뭉스런 (그러나 엄격하게 계획된) 사건들이 나열되다 철갑 옷을 입은 괴이한 무사가 등장하면서 난세에 강호를 평정하기 위한 고수들의 대결은 독한 피비린내를 불러온다. 결국 강호라고 불리는 곳의 부조리함을 재확인하며 마무리하는 <접변> 은 무협영화라는 장르 안에 온갖 것들을 뒤섞어 놓으면서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장르 자체를 해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비 떼의 살인을 설명하기 위한 전개는 초자연적인 미스터리와 호러까지 결합한데다 온몸을 검은 철갑으로 두른 무사의 존재 역시 무협영화에서는 드물게 이색적이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하 요새 (?) 의 공간적 배경도 그러하다. 이는 액션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화 속 무림고수들은 불과 줄 같은 도구를 주 무기 삼아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보여주는데 공헌하지만 이를 이용한 액션은 대결 그 자체에 거의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무협영화는 물론 족보에도 없는 각종 신무기들을 선보이는 변종 무협영화와도 거리가 있다. 간간히 등장하는 액션은 정체를 숨긴 자와 밝히려는 자, 도망치는 자와 쫓는 자의 추격전에서 벌어지는 과정의 일부이고 거의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싸움이 일정시간 이상 지속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음모가 밝혀진 후반부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뭉그적거릴 이유도 없으니 최후의 일인을 가리기 위한 '합' 이 벌어지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필 넓은 마당을 놔두고 지하로 잠입한 이유가 있는 것인데, 번쩍이는 섬광과 연기가 난무하는 가운데 공들여 지은 세트장이 한 방에 무너지고 도무지 모양새라곤 찾아볼 수 없는 뒤엉킴을 벌이다 줄을 이용해 악당의 머리를 깨부수는 결말은 동시대의 무협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차라리 할리우드 영화에 더 가까울 정도인데, 전통문화의 자장 아래 서구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온 무협영화의 패턴을 생각하더라도 <접변> 은 나름의 파격을 보여주는 셈이다. 한 편으론 이 모든 것이 익숙해 보이기도 한다. 가상의 지하세계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눈속임은 서극의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촉산> 을 위한, 더 나아가 한때 서유기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 소원이라고 알려진 그의 가벼운 몸 풀기와도 같다.
모든 것은 철갑 옷을 입은 남자의 과욕으로부터 시작된다. 난세에 천하를 평정하고 싶은 욕망이 어떻게 모두를 자멸로 이끄는가를 보여주는 냉소와 비관이 전혀 새로울 건 없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온 '무' 와 '협' 은 <접변> 에서 흔적을 찾기 힘들어졌다. 서극의 <접변> 은 무협영화의 한 시대가 저무는 시점에 도착해 독특한 방식으로 조종을 울리는 무협영화다. 그러나 그것은 서극 본인에게나 홍콩영화에 있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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