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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번역] 유진위 10년의 꿈, 서유기

유진위에게 의문을 품은 건 <정전대성> 때문이었다. 서유기 3편이라고도 하는 <정전대성>이, 나는 참 좋았다. 주성치의 <서유기> 연장선상에서 비교한다면 실망스럽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겠지만, <정전대성> 자체는 감동적이었다. 내 기억으로 <서유기>는 주성치 영화치고 대단한 흥행을 한 작품이 아니다. 흥행성적도 그냥그랬고 남우주연상도 잘 모르는 시상식에서 하나 탔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서유기>가 소수의 환호를 받는 주성치의 대표작이라고 막연히 생각했고, 때문에 <정전대성>이 등장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돈이 있어서 이걸 찍은걸까? 전작이 대단히 흥행한 것도 아닌데. 
그 의문을 풀기 위해 구글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러다 바이두 백과에서 내가 원하던 답을 찾았다. 대륙에서 텔레비젼으로 방영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네티즌들에게 끌어,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심지어 주성치가 3편을 만들거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예스 아시아에서 찾아낸 글인데, 국내 홍콩 내지(대륙)이란 표현이 다 나온다. 그래서 이게 어느 지역에서 쓰여진 글인지 모르겠더라. 하는 수 없이 국내는 국내로, 내지는 대륙으로 번역했으니 국내를 한국으로 오해없으시길. (이 번역글은 단순 감상을 목적으로 거칠게 해석된 글이며 문제가 발생시 언제든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출처는 이 곳.) 



유진위 10년의 꿈 서유기


1995년 상영된 유진위 감독 각본, 주성치 주연의 <서유기>는 사상 초유의 새로운 손오공(孫悟空)을 창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삼장(唐三藏)과 저팔계(猪八戒)의 모습도 변형했다. 특수효과가 가미된 코미디이지만 오히려 애정 비극의 향기가 더 강한 것 같다. 이 작품의 음력설 분기별 2,500만과 2,800만 수입을 올렸지만 홍콩인이 가장 사랑하는 유진위와 주성치의 합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국내에서는 <대화서유(大話西游)>라 개명)은 국내에 들어온 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인터넷 상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분석 글이 등장했고 심지어 유진위와 주성치는 전문적인 연구 대상이 되었다. 현재 <서유기>의 DVD 재발행을 기회로 유진위와 <서유기>에 대해 말해보겠다.


 <서유기> 이 영화를 왜 다시 꺼냈나? 이 작품은 이미 1995년 영화다. <서유기>란 고전 소설은 대중에게 아주 친숙한 작품이고 캐릭터다. 가령 당삼장은 자비롭고, 손오공은 비교적 쾌할하다. 그러나 당신은 최초로 손오공의 이런 모습을 전복시켰다. 당시에 그런 생각을 한 이유가 뭔가?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서유기>가 내가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고 어릴 때 읽었던 인상이 무척 깊었다는 거다. 어릴 때부터 무수한 <서유기> 단막극을 봤고 모두 좋아했다. 영화의 결말을 볼 때마다 언제나 손오공이 너무나 어쩔 수 없다고 느껴졌다. 그에게는 서경(西經)을 가지러 가는 데 선택권이 없었다. 만약 당신이 오지산(五指山)에 깔려 있고 누가 찾아와 당신더러 서경을 가지러 가자고 한다면, 당신이 가지 않는 한 계속 깔려 있어야 한다. 난 손오공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느꼈다. 만약 내가 손오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내가 그토록 반역적 인간이라면 풀려나자마자 제일 먼저 당삼장을 죽였을 거다. 그래서 생각했던 게, 만약 손오공이란 인물을 감정의 세계 속에 풀어 놓는다면 어떤 이야기가 생길까? 이런 방향에서 손오공은 어땠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삼장 또한 수다스러운 면을 부가해 현재 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됐다.


그렇게 당신이 고전 소설에 더한 희극적 색채는 홍콩의 관객 뿐 아니라 대륙의 관객도 깊이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고전적인 대사들, “일만 년 사랑해” 같은, 그런 대사는 현대 애정관의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 대사들은 자하선사(紫霞仙子)를 속이려는 의도가 가미된, 그다지 진심은 아니었다. 당신은 영화의 이런 특색들을 어떻게 보나? 젊은이들, 특히 대륙의 젊은이들이 빠져든 건 왜라고 생각하나?

현재 이 영화는 국내 젊은이들에게 클래식으로 추앙받고, 현재 모두 평상심을 이용해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해석한다. 나는 현재 수많은 것들이 베일에 쌓여있고 미화된 점이 너무 많다고 본다. 작품을 시작할 때, <서유기>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였고 창작하는 과정에서 클래식이라거나 고전을 만들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만 년 사랑해”도 당시에는 고전적인 대사로 설계되지 않았고, 재미를 위해 쓰인 것뿐이며, <서유기>를 찍고 싶다는 점도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마침 주성치가 날 찾아와 자신의 영화사에서 최초로 찍는 영화의 감독이 나였으면 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서유기>를 찍고 싶다고 하자 주성치는 기뻐했다. 술집에서 <서유기> 이야기를 그에게 다 털어놓자 그는 날 한참 쳐다보더니 말했다. “말도 안 돼! 잘못되면 어쩌라고요? 주성치가 애정물을 찍는다?” 당시 주성치는 블루칼라와 젊은 관객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내가 보기엔 여성 관객이 없었다. 만약 이전과 같은 작품을 계속 찍는다면 여성 관객을 끌어들이기란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런 희비극(悲喜劇)을 찍는다는 게 큰 모험이긴 했지만 그에게는 변화가 될 수 있고 그의 시장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그가 내 말을 믿고 작업을 시작했다. 촬영 시 절대적인 부분은 시나리오에 따랐고 당연히 촬영장에서 고치기도 했다. 그러나 각본대로가 원칙이었다. 완성 후 국내 관객은 무척 고전적이라 느꼈고, 난 기뻤다. 그러나 각본을 쓰면서 이 작품을 고전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유기>는 1995년의 주성치에게 중요한 변화였고 거대한 돌파였다. 비록 그의 이전 영화에도 애정 색채가 들어갔지만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애정 관계를 시도한 적은 없었다. 지존보(至尊宝)라는 캐릭터는 그토록 많은 여성 사이를 오가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지를 못한다.

어떤 이가 나에게 이런 애정관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난 무척 직관적인 인간인지라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발전시켜 나간다. 굳이 이유를 꼽아야 한다면, 내 나이와 큰 상관이 있다고 본다. 당시 난 40세에 들어서 중년의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에 만들었던 이야기가 그다지 완미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이런 생각을 지존보에게 투영시켰는데, 주변의 인물은 그의 과정이고 각 여성들은 사랑에 대해 각자의 방식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몇 명의 여성 캐릭터 - 자하(주인), 백정정(막문위), 춘삼십랑(남길영), 철선공주(鐵扇公主)에 대해 어떻게 분석하나? 사실 철선 공주 캐릭터는 설명이 너무 적다.

철선공주를 많이 묘사할 수 없었다. 사실 우향향(牛香香)도 있으니 더 많은 이야기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쓰며 이야기를 선택해야 했는데 결국 자하와 백정정, 그리고 춘삼십랑과 백정정의 관계, 자하와 청하 두 자매의 관계를 선택했다. 여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에게는 모두 원한이 존재한다. 그 오래된 원한이 월광보합(月光宝盒)에 이르러서야 해소된다. 그러고 나서 그 말이 나온다. 그는 왜 당삼장을 따라가기 원했고, 당삼장은 어째서 속세의 원한에서 해탈했나? 서경을 가지러 가는 이유는 <정전대성(情癲大圣)>의 사정봉(당삼장)의 “이 책을 가지고 세상 사람을 감화시켜 원한을 잊게 할 수 있다면 극락세계로 이끌 수 있다”는 대사까지 이어진다. 이건 이 여성 캐릭터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지존보에게 집착하는 면에서, 나는 백정정이 어느 정도의 자존(自尊)을 추구한다고 느꼈다. 그녀가 지존보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떠날 수 있었던 건 자하처럼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자하처럼 사랑이 깊지 않았다고 본다. 자하는 집착하고 목숨까지 내걸 정도다. 그러나 지존보가 나타났을 때는 너무 늦었다. 그는 이미 금강고(金剛箍)를 둘렀고 그러니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촬영이 완료된 후에야 내가 발견한 점은, 나 자신이 집착에 관한 사랑 이야기를 말했고 남녀 모두 몹시 집착하며 얻는 게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점이었다. 세상에는 ‘소아(小我)’의 애정만 있는 게 아니고 상대적으로 ‘대아(大我)’의 애정이 존재한다. 대아(大我)가 당삼장이고, 그제서야 난 당삼장이란 인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그걸 <정전대성>에서 설명한 건데,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반드시 결과가 있는 게 아니고 결과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끝은 아니란 거다. 당신은 한 여자를 사랑하다가 세상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게 집착이다. 만약 그 여인을 놓아버리고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게 당신이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각의 차이일 뿐이다.


결말 부분에서 손오공이 목격한 건 아마도 환생한 저팔계와 성루 위의 주성치와 주인이다. 윤회로 환생한 것인가 아니면 계속된 것인가?

관객의 상상에 따라, 혹자에게는 이게 환생으로 비칠 거다. 혹자에게는 그들이 함께 가지 못했기에 그때 그가 어떤 사람의 몸을 빌려 한 행동으로 성루 위에 누가 있었더라도 상관없었을 거다. 나는 주성치가 성루로 올라간 이유를 모두의 마음에 맡겼다.


당신이 시공초월에 관심이 많은지 시공을 초월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꽤 많다. 가령 <무한부활(无限复活)>, <초시공요애(超時空要愛)> 모두 이런 이야기다.

당시 나는 4대 명저의 전복을 시도하고픈 장난스런 생각이었다. 시공을 초월하는 내용의 영화가 무척 재밌게 느껴졌기에, <초시공요애>의 각본을 썼다. 그러나 <무한부활>은, 진짜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유기>에서 제대로 말하지 않은 부분을 다시 찍고 싶었을 뿐이다 (웃음). 내가 시공 초월 소재를 특별히 좋아하는 게 아니고, 단지 이 이야기에는 시공을 왕래하는 게 적합했기 때문이다.


특수효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에는 엄청 많은 특수효과가 요구됐다. 십 년 전과 현재를 비교해보면 당신은 만족하는가? 현재 다시 찍고 싶다고 생각해봤나?

10년 전 주성치도 만족하지 못했다. 당시 난 1, 2편을 다 찍고 나서 느끼기 시작했다. 이 ‘소아’의 세계 속 그런 류의 ‘소아’의 애정은 ‘대아’의 애정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당삼장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기술이 부족해 찍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작년 주성치의 <쿵푸 허슬>을 프로듀서하면서 기술이 발전한 정도에 감명 받았다. 당시 우리는 헐리웃과 비교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 홍콩이 더 이상 앞으로 한발 내딛지 않았다면 영원히 뒤로 퇴보하게 된다. 비록 헐리웃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시도는 해볼 수 있는 거고 영화를 찍은 거다.


오픈세트로 넘어가 보자. <서유기>가 당신이 중국 대륙에서 찍은 첫 번째 작품인가?

아니다, <화기소림>이 먼저다.


협서(■西)에서 촬영했나?

주로 은천(銀川)과 서안(西安)에서 촬영했다. 그 곳의 고성(古城)과 사막은 영화의 분위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빠진 듯]


솔직히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난 영화를 빨리 완성해 주성치가 돈을 벌게 해주고 싶었다. 난 대륙으로 가서 장소를 섭외했지만 사실 심각하게 고려하지는 않았다. 맘에 드는 곳이면 찍었다. 그러나 <천하무쌍>을 찍으며, 촬영과 미술에 더 요구치를 높였다. 마음 자세도 달랐고 영화 촬영의 즐거움을 알기 시작했다. 나와 스탭들은 내키는 대로 즐겁게 일한다. 예전처럼 원수 같이 일하지 않는다. 지금은 날마다 진짜 즐겁게 일할 수 있다. 주성치가 <쿵푸 허슬>을 찍는다고 캐나다로 전화해 날 찾을 때, 나는 바로 말하지 않고 그와 대화할 때 이런 말을 했다. 현장의 분위기가 긴장되지 않고 즐겁게 촬영하는 걸 보증해주면 참여하겠다, 고. <쿵푸 허슬>이 완성되고 정말 기뻤다. 주성치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며 촬영 중, 최소한 내가 현장에 있을 때만큼은, 욕을 안했기 때문이다. 난 감독은 이렇게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즐겁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전대성>은 <서유기>의 연속인가 아니면 프롤로그인가?

연속이 아닌 독립된 이야기이다. 자하, 백정정, 지존보가 애정에 집착하며 일정한 결과를 도출할 때 대조적으로 당삼장은 무척 박애주의자였고 억지로 애정 라인에 당삼장을 끼워 맞출 수 없었다. 이런 점을 깨달았지만 1. 기술의 부족 2. 그때는 내게 <정전대성>을 찍을 기회가 주어질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국내와 홍콩의 관객들은 당신 영화의 의미를 확대시킨다.

어떤 영화에도 그런 점이 있다고 본다, 어떤 영화에도 그런 점을 덧붙일 수 있다. <서유기>를 시작할 때 난 이게 고전이 되리라 생각지 못했다. 재미로 시작했고 현재의 모습이 됐다. 어떤 사람들은 내 작품을 보며 그 안에서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해낸다. 그러나 창작인의 해석은 내 잠재의식이다. 가령 <92 흑장미 대 흑장미>를 만들 때 영화 속 가무 장면을 어떡케 생각해냈겠는가? 난 일부러 클래식을 만든 게 아니라 재미로 그런 것뿐이다. 내가 유일하게 처음으로 심각하고 고심한 영화는 <91 신조협려>였는데, 난 만화 같은 영화가 너무 찍고 싶었다. 난 촬영, 조명, 조형 등을 이전과 달리 세심하게 조율했다. <서유기>도 마찬가지였는데, 결코 감동적인 작품을 찍을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관객들이 많이 좋아해줘서 참 기쁘다. 


나가영은 왜 사극 영화에서 팝송인 Only You를 부르나?

그가 월광보합을 가지고 수많은 곳을 가봤으니까. 로마나 인도도 가봤고. 그래서 영어로 말하는 게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Only You의 재밌는 부분은 나가영이 어떤 부분에서 멈췄다가 다시 이어 부른다는 거다. 난 이게 너무 재밌었다. 가사는 내가 일부러 압운이 엉망이도록 만들었다. 월극의 대가인 나가영이 압운이 틀린 노래를 부르는 게 더 재밌었다.


<서유기>의 액션 풍격은 어떤가?

이 영화의 중점은 액션이 아니다. 당시 수준의 기술이 적절하게 사용됐고 국내 관객들은 CG가 쓰인 부분에 별 말이 없었다.


액션위주가 아니라면 기본적인 틀은 뭔가?

난 비극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희극적인 방법으로 찍었다.


좀 전에 당신은 4대 명저를 영화화하고 싶다고 했었다. 현재 대부분 중국으로 가서 현대극이나 고전 소설에서 재제를 뽑아 영화를 만든다. 당신도 대륙에 가서 찍고 싶은 소재가 있나?

당연하지, 중국에 있는 수많은 소재와 이야기는 찍어도 찍어도 끝이 없다.


당신이 <서유기>를 두 편으로 나눠 완성한 건 당시에는 모험이었다. 관객이나 제작자의 반응도 의외란 쪽이었다.

관객에게는 거대한 도전이었고 제작자는 좋아했다. 나는 주성치가 이 영화로 많은 돈을 벌리라 기대했다. 관객이 두 편을 보는 건 부담스러워해서, 나중에 내가 한 편으로 편집해서 만들었더니 반응이 참 좋았다. 왜냐면 빠르게 주변 이야기는 잘라내 이야기는 쉬웠으니까. 2시간이 안됐지만 감정선에는 힘이 넘쳤다.


이 판본이 정화판이라 할 수 있다.

난 주성치가 왜 대륙에서 발행을 안 한지 잘 모른다. <서유기>의 관객은 반드시 곧 진품을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