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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번역] 유진위 감독 인터뷰


유진위 감독 인터뷰 번역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서유기 월광보합>과 <서유기 선리기연>은 본문중에 합쳐서 <대화서유>로 표기됩니다. 중간에 <92 흑장미 대 흑장미> 동영상을 삽입했는데,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끝까지 보시길. 제가 미친 듯이 웃었던 장면이었거든요. 단순 감상을 위한 목적으로 거칠게 번역된 글이며 문제가 발생할 시 언제든 삭제됩니다.
원문 출처 : 이 곳 






유진위……이 의혹 덩어리는 우리를 늘 곤혹케 한다. 왜 미술을 공부한 그가 영화라는 이 길로 들어선 걸까? 왜 왕가위와 한 패가 된 걸까? 왜 늘 가명으로 영화를 만드는 걸까? <대화서유>를 먼저 생각해낸 건 주성치 일까, 아니면 유진위일까? 특이한 능력? 시공을 통과하는? …….


이번에 우리는 엄청난 노력을 들여 결국 유진위 독점 인터뷰에 성공했다! 당신 가슴 깊숙이 묻어둔 의문들은 이번 기회에 결국 해답을 찾을 것이다.


뉴웨이브에서 왕가위까지


청년 시절 유진위는 영국에서 미술을 4년 공부했다. 홍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자신이 디자인 엔지니어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호히 학업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모색, 재무 회사에 들어갔다. 곧 그는 그 회사의 영화 제작을 책임지는 경리가 됐다. 당시 그가 참여(기획 혹은 프로듀서)한 작품은 <변연인(邊緣人)>, <흉방(凶榜)>, <살출서영반(殺出西營盤)>, <열화청춘(烈火靑春)> 등이었다. 홍콩 영화를 약간만 아는 사람이라면 숨이 멎을 것이다. 왜냐면 이 작품들은 전부 홍콩 뉴웨이브의 대표작이니까.


“영화에 대한 관심은 어릴 때부터 시작됐어요. 당시 어머니가 거의 날마다 절 데리고 영화를 보러 갔으니까요. 그때 영화가 지금 광동어 잔편(殘片)으로 불리는 것들이었어요.”유진위가 영화 제작에 참여하던 시기는 보물을 캐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 제작사는 1985년 불행히 문을 닫는다. “회사가 도산하고 전 영화판을 1년가량 떠나있었죠. 그러다 내 자신이 영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러나 어떤 영화사가 망해버린 옛 영화사의 직원을 경리로 부르겠나? 그래서 유진위는 시나리오 쓰는 길을 선택한다.


상상력이 무척이나 풍부한 유진위였지만 시나리오 작업은 생각처럼 순조롭지 않았다. 그가 최고로 자포자기했을 때, 우연히 막 해고된 다른 시나리오 작가, 왕가위를 알게 된다. 남들이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두 사람은 보자마자 의기투합했다. “왜 우리 둘은 이렇게 일이 안 되는 거야?” 두 사람은 불행을 한탄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았다.


그 당시 이들은 날마다 서로 다른 영화사에 가서 스토리를 말했다. 하늘은 능력을 저버리지 않는 법, 결국 어느 날 그들은 동시에 기쁜 소식을 듣는다. 각자 자신이 독립 감독으로 연출할 수 있는 작품을 연락 받는다.


얼마 후, 유진위의 <맹귀차관(猛鬼差館; 1987년 왕가위 역시 시나리오와 프로듀서로 참여)>과 왕가위의 <열혈남아; 몽콕하문(旺角卡門, 1988)>는 성공을 거둔다. 이때부터 이 둘은 각자의 방향으로 부단히 전진했다. (유진위와 왕가위는 당시 농담으로 서로 <맹귀차관> 속 캐릭터 이름인 ‘기안(技安)’과 ‘금맥기(金麥基)’를 장래에 시나리오 작가 필명으로 쓰자고 약속한다. 유진위는 후에 결국 이 약속을 지켰지만 왕가위는 죽어도 금맥기 같은 저속한 이름은 쓰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왜 그렇게 친한지 의아해합니다. 우리 둘은 한 명이 상을 타고 한 명이 보너스를 받고, 이렇게 천하무쌍(天下無雙)의 조합으로 함께 길을 간다는 게 당연하잖아요?” 유진위의 말이다.


도성에서 92흑장미까지


그러나 “보너스를 탔지만” “상을 타지 못한” 행운은, “상을 탄” 사람이 순식간에 자신이 찍고 싶은 작품을 할 수 있는 것과 달랐다. 당시 유진위의 귀신 영화는 동남아에서 성적이 아주 좋았다. 당연히 그가 다른 작품을 찍고 싶어도 사장이 늘 의자에서 튕겨 일어나 소리 쳤다. “안 돼. 유진위, 귀신 영화를 찍게나!”


이 상황은 1989년까지 이어져, 그는 주성치가 주연한 <망부성룡(望夫成龍)>(이 영화는 천만 홍콩 달러를 넘긴 첫 주성치 영화였다)을 제작했다. 당시 왕정의 <정전자; 도신>의 인기가 엄청났다. 오사원(吳思遠)은 이 기회를 타 유진위와 주성치에게 도박 영화를 찍으라고 했다. 그러나 주성치에게 어디 주윤발과 같은 기백이 보였겠는가. 당시 대륙에서는 ‘초능력’이란 화제가 유행이었는데 유진위의 재치가 번뜩였다. “보잘 것 없는 인물이 영웅이 되는 게 어떻게 말이 되겠어? 초능력으로 현실도피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어.”


모두가 알다시피 <도성(賭圣, 1990)>은 홍콩 흥행 기록을 깨버리고 주성치는 이때부터 인기 스타가 됐다.


“나와 주성치는 당시 그 흥행기록을 보고는 얼이 빠졌죠. 전혀 생각도 못한 결과였어요.” 유진위는 “나중에 주성치와 분석해보니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죠. 우리 둘 모두 어릴 때부터 광동어 잔편(殘片) 보기를 좋아했어요. 내 코미디는 논리가 비교적 천마행공(天馬行空)했고 주성치의 연기 방법도 무척 특이했는데 우리 둘이 그렇게 모이니 나중에 사람들이 ‘무리두(无厘頭: 루니툰의 음역)’이라고 부르더군요.”


“도성을 찍고 나서는 계속해서 <도패(賭霸)>, 도 어쩌구 하는 영화를 찍었는데 더 이상 찍고 싶지 않았어요. 시나리오를 한 편 써서 골든 하베스트로 가져갔죠. 모두 비웃더라고요. 심지어 유덕화가 세운 천막공사(天幕公司)도 거절했어요. 나중에 진짜진짜 작은 제작사에 가지고 가서는 제 임금을 대폭 줄여도 좋으니까 이 작품을 내가 찍게 해달라고 했어요. 사장이 무척 괴상하다는 듯이 절 보며 말하더군요. ‘유진위, 지금 자네 몸값은 무척 높지 않나. 왜 우리 같은 제작사에 와서 그렇게 적은 제작비로 만들고 싶어 하나?’”


“제……가 좋아하니까요.”


그가 “하고 싶다”고 대답한 작품이 바로 <92 흑장미 vs 흑장미>이다. 이 작품에 유진위는 자신이 광동어 잔편(殘片)에 품고 있던 애정을 쏟아 부었다. 이 영화는 당시 모든 영화인들이 크게 놀랄 정도로 적지 않은 상을 수상했고 그 뿐 아니라 지금까지 홍콩에서 168일이란 최장기간 상영일자를 기록으로 가지고 있다. 또 현재까지 홍콩에서는 여전히 영화에 나온 <구환여몽(旧歡如夢)>란 노래를 부른다.


“광동어 잔편(殘片) 시대의 인간은 비교적 순진했어요, 그게 너무 그리웠어요.”‘흑장미’ 계열을 제외하고, 가장 대중에게 친숙한 광동어 잔편(殘片)의 교단(橋段)은 나중에 만들어진 <동성서취>에 나온다. (그러나 사실상, 유진위가 <맹호차관>을 찍을 때 이미 광동어 잔편(殘片)의 교단(橋段)이 나온다. ‘흑장미’는 이를 더 완벽하게 실현해냈다.)


<동성서취>에서 <대화서유(大話西游)>까지


“흑장미 다음에 원래는 <동사서독> 2부를 찍으려고 했어요. 나중에 보니 왕가위의 상황은 이랬죠. 한 달 전에 홍칠공이 싸우는 부분을 찍는데 한 달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홍칠공은 거기서 싸우고 있으니 투자 면에서 문제가 생겼죠. 왕가위가 저한테 자신은 도저히 명절 때까지 완성할 수 없으니 저더러 빨리 명절용 영화를 찍으라고 하더군요. 저야 물론 1부가 완성이 안됐는데 무슨 수로 2부를 찍냐고 물었죠. 왕가위가 그러더군요. ‘상관없어, 웃기기만 하면 돼.’”


“그러니 원래 제가 찍으려던 작품(동사서독 2부)은 <동성서취>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나중에 이렇게 변한 건데, 왜 <동성서취>같은 모양새가 됐느냐?  제……가 좋아하니까요.”


유진위는 <동성서취>를 즐겁게 찍었지만 배우들은 고통스러웠다. 낮에는 이쪽(<동성서취>)에서 정신병자처럼 장난치고, 밤에는 저쪽(<동사서독>)에서 아비를 잃은 것 같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연기해야 했으니까. 그러니 당신은 의아해할 것 없다. 삼공주(三公主)가 왜 자신이 모용언(慕容嫣)인지 모용연(慕容燕)인지 헷갈려하는 지. 왜냐면 당시 배우들은 이미 정신분열 상태였다. (이 두 작품은 동시에 촬영됐고 결과는 무척 달랐지만 모두 두 감독 각자의 대표작이 되었다.)


<화기소림(花旗少林)>, <불초자 열혈남아; 도시정연(都市情緣)> 등 몇 편의 흥행작을 찍은 후, 유진위는 마침내 그 자신에게 커다란 도약이 된 <대화서유>를 만들었다.


“당시 스토리를 주성치한테 말했더니, 그가 절 3분 정도 꼭 외계인을 보는 것처럼 뚫어지게 봤어요.” 유진위는 주성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자네가 만날 깊이 없는 코미디만 찍는다면 위대한 배우가 되기 힘들 거야. 만약 자네가 관중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건…….”감동받은 주성치는 전무후무한 손오공으로 탄생한다. <대화서유>는 주성치의 변환점일 뿐 아니라 유진위에게도 변환점이었다. 감동적인 비극이 유진위에 의해 코미디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강호에서 물러나 <무한부활>까지


“나 같이 중년이 되면, 그간 살면서 했던 행동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잘못한 것 같고 친구한테도 제대로 안한 것 같고……만약 시공을 초월해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무한부활>을 찍으면서, 제가 <대화서유> 안에서 깨닫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했죠. 월광보합과 회두석(回頭石)을 이용해 시공을 초월할 수 있었고, 자신의 양심을 찾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거죠. 현재의 인간이 잃어버려도 월광보합을 찾으면 자신의 양심을 찾을 수 있고 자신의 실상을 찾게 되고 자신이 잃어버렸던 모든 그리운 것들을 찾을 수 있어요.”


이런 우의(寓意)는 유진위가 자신의 아내에게 느낀 점이다. <대화서유>를 찍은 후 그는 점점 어떤 생각이 싹텄고 결국 1998년 <초시공요애(超時空要愛)> 후 은퇴를 결정, 밴쿠버로 돌아가 전업 남편과 전업 아빠로 살아간다.


2002년 명절용 영화 <천하무쌍>으로 다시 나타난 이유는 “왕가위 같은 무뢰한을 거절하기란 진짜 어렵기 때문”이었다. 유진위는 억울하다는 얼굴이다.


<천하무쌍>을 완성하고 그는 다시 은퇴를 발표한다. 주성치가 <쿵푸 허슬>로 여러 차례 그에게 전화로 독촉 - “돌아와요! 함께 일하자고요, 진짜 재밌을 거예요.”- 하기까지.


유진위가 표면적으로야 아내와 딸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심에 어찌 돌아오고 싶지 않았겠는가? 나중에 결국 아내의 허락을 받자 기뻐하던 그는 주성치의 애를 태우며 이런 조건을 걸었다. “내가 돌아가는 대신 자네가 절대 현장에서 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야 하네.”


“그럼 주성치가 진짜 욕을 하지 않았나요?” 우리가 호기심에 물었다.


“어느 날 주성치가 어떤 배우한테 무척 화가 났어요. 그가 욕을 하려는데 제가 옆에 서있었죠. 날 보더니 결국은 온화한 말로 그 배우에게 말하더군요. ‘만약 법률상 살인에 아무 책임이 없다면 지금 당장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


신출귀몰한 포도


만약 유진위 영화의 풍격을 잘 안다면 그가 무척이나 특이한 사람이란 걸 발견할 수 있을 거다. 당신은 어떤 영화에서 감독의 이름이 다른 사람 이름인 걸 보고 그 감독과 유진위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무척이나 의심했을 거다. 우리가 이 의문을 꺼내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당시 제가 관객과 하던 장난이에요. 당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유진위가 아닌데도 흥행이 된다면 시나리오의 무지막지한 중요성을 증명하는 거겠지? 그래서 그렇게 했죠. <91 신조협려>에서는 여대위(黎大■; 결국 어떤 이가 유진위와 여대위가 동일 인물이라고 의심했다)라는 이름을 썼고, <92 흑장미 vs 흑장미>에서는 진선지(陳善之; 스텝 중에서 의상미술 감독의 이름)라고, <천장지구(天長地久)>에서는 유진명(劉宇鳴)이라고 썼죠. 그렇지만 이게 홍콩 관중의 습관을 바꾸지 못한다는 걸 흥행 성적이 증명했어요. 너무 불공평하다 싶었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