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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 리덕스 관객과의 대화 정리(사진추가)

오늘 동사서독 리덕스를 봤습니다. 그리고는 감독님이 오셔서 대화가 진행됐습니다. 절반 즈음 기억에 의존해서 정리하는 것이라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의미 깊은 대화들이었기에 올려봅니다.(일부 정보는 편집해서 제외했습니다)


허문영(사회) - 영화 잘 봤다. 감독님은 1994년에 영화사를 설립해서 동사서독을 만들었고, 2008년에 이 영화를 리덕스로 다시 만들어서 내 놓으셨는데, 그럼 감독님에게 동사서독은 어떤 의미인가?


왕가위 - 아비정전 이후 내 스타일의 영화에 대해 많은 이들이 위험하다, 하면 안 된다 라면서 나를 말렸다. 그러자 왠지 남의 밑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는 내 자신의 힘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만약에 내가 그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있었다면, 그래서 동사서독을 못 만들었다면, 이후에 나온 나의 모든 영화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아비정전에 대해 더 말하자면, 한국에 있는 친구가 나에게 전화해서 너 한국 오면 죽었다고, 관객들이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나 주스를 스크린으로 던지더라고 얘기한 적이 있더라.


허문영 - 그런 건 아니고 관객의 3분의 2정도가 환불을 요구했다.


왕가위 - 혹시 사회자도 그런 것 아닌가?


허문영 - 난 안 그랬다. 난 당신 팬이다.


왕가위 - 그게 내가 두 번째로 만든 영화라서 그때는 내 팬이 아니었을 텐데.


허문영 - 이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관객질문으로 들어가겠다.(좌중 폭소)

관객1(여성) - 감독님의 에로스를 보고서 감명을 받았다. 에로스를 찍을 때 어땠는지?


왕가위 - 내가 그 영화를 만들 때 파스빈더의 영향을 받았고,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기에, 그의 영화의 음악을 맡은 작곡가를 수소문해서 겨우 작업할 수 있었다.


(이후 저 여성이 에로스에 대한 질문을 더 하려했으나 사회자가 제지.)


관객2(남성) - 제작발표회 당시에 ‘전혀 새로운 무협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던데 그게 이 영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들면서 참고한 무협영화가 혹시 있음 알려달라.


왕가위 - 나이가 어린 거 같은 데 몇 살인가?


관객2 - 20살이다.


왕가위 - 당시에 6살일 텐데 그런 걸 알고 있다니 기억력이 좋은 듯하다.(관객 웃음) 원작소설 자체는 몇 백번을 읽어 봤다. 그리고 이걸 영화로 만들면서 나만의 무협물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그저 몇백년 전의 사람들의 얘기로만 하는 건 싫었기에, 거기에 현대인의 감성을 넣겠다고 결심했다. 14년 전에는 보는 모든 이들이 위험하다, 안 좋다고 했지만, 14년이 지난 지금은 대부분 다들 동의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위험하다, 안 좋다고도 한다.



관객3(남자, 중국인) - 동사서독을 1994년에 만들어서 14년이 지난 지금에야 완결했는데 소감이 어떠한지 듣고 싶다.


왕가위 - 개인적으로 영화는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느끼는 건 차이가 없다. 하지만 장국영의 죽음과 임청하의 은퇴 등을 겪으면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아련한 감정이 느껴지더라. 그런데 이 감정이 묘하게 영화의 주제와 관련이 있더라. 즉, 도화는 남아도 사람은 남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사람은 없더라도 도화는 핀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관객4(남자, 중국인) - 감독님의 모든 영화를 봤고, 이 영화를 보기위해 북경에서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 복원을 결심하게 된 것은 서정적인 이유인가, 아님 기술상의 부족한 점을 위한 것이었나?


왕가위 - 원래 오리지널 필름을 현상했던 회사가 90년대 중반에 도산했고, 원본을 겨우겨우 구했으나 물에 잠겨있었던 덕택에 필름이 전혀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외국에서 겨우 하나의 프린트를 구해서 복원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을 만든 이유는 만약 내가 이것을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관객은 이 영화를 인터넷이나 DVD로만 만날 텐데, 그 버전은 내가 생각했던 원래의 의도가 들어가 있지 않기에, 원래의 의도를 살리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 기술의 도움도 받았다. 그리하여 몇몇 장면들은 원래의도에 맞게 갈 수 있었다. 아쉬웠던 건 장국영의 나레이션인데,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를 불러서 녹음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남아있는 프린트에서 겨우겨우 음향을 최대한의 기술을 동원하여 복원을 겨우 할 수 있었다.(실제로 그 부분 음향이 좀 안 좋은 편입니다.)

기술의 도움을 받을 때는 필요악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기술은 당시에 부족했던 것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또한 당시 부족했을 때 가졌던 열정이나 생각들을 잊어버리고 안일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에 복원을 하면서 14년 전의 나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라고 계속해서 자문하면서 기술에 묻히는 걸 경계했고, 그렇기에 기술이 영화를 잡아먹지 않고 의도를 살리면서 기술역시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다.


관객5(여성) - 감독님의 팬이라 영화를 공부하고 있고 심지어 휴대폰 뒷 번호도 2046이다. 영화에서 취중몽사(영화 속에서 나오는 술)가 나와서 하는 질문인데 만약 이때까지 당신의 영화에서 출연했던 배우들이 당신과 함께 있다면, 그 중에서 누가 당신이 취중몽사를 마시고 잊어버릴 정도로 좋은 배우인가?


왕가위 - 취중몽사를 그들이 다 마시게 하고 난 안마시겠다.(좌중 폭소) 그들 대부분이 미녀지만, 각각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거기서 고르기가 힘들다.


허문영 - 시간이 모자란 관계로 딱 한분만 더 받겠다.


(여자를 고르자)


왕가위 - 사회자는 왠지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자가 많다.(좌중폭소)


관객6(여성) - 주성치의 서유기 2부작을 보면 동사서독에서 베낀 대사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왕가위 - 주성치의 영화가 그걸 베낀 게 아니다. 동사서독의 편집기사중 한명(유진위)이 그 영화의 감독이고, 내가 당시에 (동사서독을) 20고까지 쓰고 나서 이것에 지겨워져서 책상에 쳐 박은 뒤, 그에게 한번 보여준 적이 있다. 그러자 며칠 뒤에 그가 찾아와서 ‘감독님, 저 주성치랑 그 영화 찍었습니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왜 남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냐?’고 하니 그가 ‘아니 20고나 쓰고 안 찍고 보여주시기에 찍어도 되는 의미인 줄 알아서 주성치랑 찍었습니다.’하더라.


(보충설명 - 유진위는 동사서독의 편집에 어느 정도 연관되어있고,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둘이 친구관계이기에 왕가위의 영화가 제작이 지연되는 동안 그가 그 배우들을 데리고 작업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동사서독]지연 당시 그 배우들과 스텝들을 데리고 만든 [동성서취]와 [2046]지연 당시 남아있던 배우들과 스텝을 데리고 만든 [천하무쌍]이 있습니다. 이러니 서유기 2부작에 그게 들어가도 이상하진 않습니다.)


허문영 - 마지막으로 감독님 얘기를 듣고 마치겠다.


왕가위 - 14년전에 만들어서 오늘에야 끝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각각의 연도의 다른 버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제야 오늘날에 제대로 끝난 것이다. 14년 전에 보고 이 영화를 보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오늘 처음 보신 분들도 있을 텐데, 모두 다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