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료

[번역] 영춘권(咏春拳)과 홍콩 영화 - 1

  
이 글은 "我武威扬 咏春影事"를 1/2 정도 번역한 글입니다. 요새 영춘권에 좀 꽂혀서(배우고 싶다!!!) 찾아낸 자료이고 만약 국내에서 <엽문>이 개봉하면 참고가 될 성격이라 판단되어 해석을 시작했습니다..........만, 와 정말 어렵네요. 사람 이름인지 무술 용어인지 시종 구글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해석 자체의 질에 대해서 전혀 자신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아래에 소개된 영화들이 우리나라에 소개가 됐는지, 되었다면 국내 출시명과 제목이 같은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해석을 했어요. 읽으시는 분 중에 글자가 틀렸다거나 해석이 잘못됐다거나 아니면 다른 알려주실 정보가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단순 감상을 위해 거칠게 번역된 글이며 문제가 발생시 언제든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1974년, 장철 감독은 대만으로 건너가 장궁(长弓) 영화사를 설립하고 순식간에 쿵푸 영화 몇 편을 찍었다. 그 중 하나가 《홍권과 영춘(洪拳与咏春)》이다. 영화에서 '특별히 소개된' 양대 악역 중 한 명이 바로 양가인(梁家仁)이다. 장철의 맘에 든 양가인은 계약을 체결, 계속해서 《소림오조(少林五祖)》、《마르코 폴로(马哥波罗)》、《방세옥과 호혜건(方世玉与胡惠乾)》같은 쿵푸 영화에서 악역을 맡았다. 특별한 성격의 캐릭터로 굳어진 양가인은 계속해서 악역을 연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세상사 절대적인 일 없듯이, 4년 후 홍금보에게 발탁된 양가인은《찬선생과 조전화(赞先生与找钱华)》에서 중요한 역 - 일대 종사 - 을 맡게 되고, 나중에는 TVB 드라마인  《천룡팔부(天龙八部)》에서 대협 교봉(乔峰)을 연기했을 뿐 아니라 원가반(袁家班)의 《곽원갑(霍元甲)》의 주연이 된다.


양가인과 영춘권의 인연은 그가 출연한 <홍권과 영춘>이 첫번째고, 처음으로 주요 배역을 연기한 <찬선생과 조전화>에서 연기한 영춘의 종사 양찬(梁赞), 마지막으로 TVB 드라마 《불산 찬선생(佛山赞先生)》에서 연기한 양찬의 사부 양이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당가(唐佳)와 유가량 두 사부가 <홍권과 영춘>의 무술 지도를 했지만 영춘권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1978년까지 홍권(유가량의 <홍희관(洪熙官)>이 대표작)과 상형권법(象形拳法; 성룡의 <사형도수>가 대표작)이 유행했다. 이런 흐름을 돌파하고자 홍금보는 영춘의 달인 위응취(黎应就)를 찾아가 자세한 설명을 끝까지 듣고는 박수를 치며 감격했다. "과연 대단한 권(拳)입니다!" 이어 홍금보는 영춘권 자료를 수집해 <찬선생과 조전화>를 완성했다.

[양가인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과 동영상은 붉은 모란 님 블로그로]

 
<찬선생과 조전화>는 글자 그대로, 청말 두 명의 영춘 명가 - 양찬이 사부이고 조전화가 제자 - 이다. 영춘권의 역사는 홍권 사조인 지선과 동기인 오매사태(五枚师太)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매사태가 이 권을 만들고 제자인 엄영춘(严咏春)이 이를 재정비해 영춘이라 이름지었다 전해진다. 엄영춘은 남편 양박주(梁博俦)에게, 양박주는 황화보(黄华宝)와 양이제에게, 두 사람은 함께 양찬(梁赞)에게 전수한다. 양찬은 장자인 양벽(梁璧)과 제자인 진화순(陈华顺; 즉 조전화)에게, 이 둘은 엽문에게 전수한다. 영춘권은 실전을 중시하고 동작의 간결함을 추구, 쾌공(快攻)이 핵심이다. 때문에 장교대마(长桥大马)의 홍권과 복잡한 초식의 상형권법 과는 다르게 스크린에 적합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춘에 담긴 실전(实战)이란 특성을 꿰뚫어 본 홍금보는 현대적인 격투기 원리로 영춘권법을 해석함과 동시에 체계적인 무술 동작을 결합해 다른 풍격을 갖춘 <찬선생과 조전화>를 완성, 당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홍금보의 능력은 <찬선생과 조전화>로 쿵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 말고도, 신인을 발굴했다는 데 있다. 엄청난 악역 배우에서 양찬이란 종사 역을 연기한 양가인의 난이도는 괜찮았고 이해력도 높았다. 이에 반해 조전화를 연기한 왕호의 퇴공(腿功)은 일류였지만 연기력 부족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채 결국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갔다.


1981년 홍금보는 다시 영춘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양찬 사부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고 제목은 <패가자(败家仔)>였는데 가반(家班)의 형제들을 주연으로 출연시켰다.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원표가 소년 양찬을, 진훈기가,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달인 임정영이 양이제를, 홍금보 자신은 사부 황화보를 연기했다. 이들의 실력도 대단했지만, <패가자>의 가장 뛰어난 점은 주제였다. 당시 범람한 쿵푸물은 이야기가 대동소이해 복수가 그 내용이 아닌 게 없을 정도였다. 이에 유감을 가진 유가량이 <무관(武馆)>을 만들어 무(武)를 겨루다 이기면 바로 끝을 맺고 무로 친구를 맺는 이야기를 펼쳤다. 같은 해 홍금보가 만든 <패가자>는 마치 의도적인 대답같다. 어떤 무학을 절차탁마해도 남에게 적지 않게 해를 끼치고, 진정한 격투에 무슨 여지가 남겠으며, 오직 너 죽고 나 살기만 있을 뿐, 승부가 나면 끝을 맺는게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유가량의 <무관>은 홍권 종사인 황비홍의 어린 시절의 수련이 주 이야기이고 홍금보의 <패가자>는 영춘 명사인 양찬의 성장과정을 소재로 삼았다. 이 두 편의 영화가 보이는 비무(比武)에 대한 차이가 홍권과 영춘의 구별을 말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단지 영춘과 관련된 영화의 수가 홍권에 그 수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황비홍을 다룬 영화가 100편이 넘는다는 건 잘알려진 사실이다. 홍희관(洪熙官)을 소재로 한 영화 역시 그 수를 셀 수가 없다. 그러나 영춘 고수를 다룬 영화는 홍금보의 <찬선생과 조전화>, <패가자> 두 편 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춘은 일반적인 남소림의 권술(拳术)과 다르다. 영춘은 장기간의 리수(黐手) 연습을 거쳐야 하고, 리수의 가장 효과적인 훈련 방법은 개인 교습이었다. 따라서 제자가 적을 수 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교습비가 꽤 높았다. 일반계층이 부담할 가격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부잣집 자제만이 배울 수 있었고 당시 '소야권(少爷拳: 도련님 권법)'이란 별명까지 있었다.

[리수(黐手) 설명은 이 곳으로]
[홍희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박재환 님 블로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