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화 (暗花; The Longest Nite, 1998)
감독 : 유달지
출연 : 양조위, 유청운, 소미기, 용방, 왕천림, 임설, 정호남
[암화]의 무대는 마카오다. 마카오의 암흑가를 양분하고 있는 K와 렁이 8개월이나 피비린내 나는 항쟁을 벌이자 10년 동안 조용히 지내온 대부 홍이 그들의 싸움에 개입하려 한다. K와 렁은 홍의 개입 없이 직접 협상을 맺기로 하는데, 협상을 앞두고 K가 렁의 목에 5백만 달러를 걸었다는 괴소문이 퍼진다. 그 소문을 듣고 렁의 목숨을 노리는 킬러들이 속속 마카오로 몰려들고, 무슨 이유에선지 K의 아낌을 받고 있는 부패경찰 샘(양조위)은 K로부터 렁이 협상을 맺기 전에 살해당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그리고 K의 난폭한 아들 마크(정호남)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샘이 마카오에 들어온 킬러들을 쫓아내느라 애쓰는 사이에 토니(유청운)라는 인물이 나타나는데, 그 역시 렁의 목숨을 노리는 것 같지만 그의 정체와 진짜 목적은 명확하지 않다. 한편 샘의 집에서 목 없는 시체가 발견되고, 그는 차츰 음모에 말려들기 시작한다. 샘은 K가 렁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살인을 청부했다는 의심을 받는데.
[영웅본색]이 등장한지 10년이 훌쩍 지난 뒤에 만들어진 이 범죄 스릴러에는 더 이상 홍콩 누아르의 그림자가 없다. 신념 혹은 의리 같은 미덕은 갱들 사이에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암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삼합회 마피아들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에 히치콕 영화의 주된 주제, 즉 누명 쓴 사나이 이야기와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요소를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겠지만, [암화]는 초중반부까지는 답답하고 지루하다. 그것은 주요한 등장인물인 토니 등의 동기나 행동이 명확하지 않고 어색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중국성’의 웨이트리스인 매기(소미기)가 마크의 곁에서 구토를 하고, 그 때문에 구타를 당하는 장면이 있다. 이 여자가 왜, 하필이면 여기서 구토를 하고 있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게다가 이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폭력 묘사는 극히 잔혹하기 때문에, 담이 약한 관객들의 짜증과 분노를 일으키기에 딱 알맞다. 어색한 행동과 잔혹한 폭력의 결합. 토니가 모종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사이 샘은 K가 렁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고 헛소문을 흘린 것으로 추정되는 용의자의 손톱을 뽑으며, ‘황제 정식’이라는 식당에서 만난 살인청부업자의 양 손을 뭉개버린다.
그러나 중반부터 [암화]는 갑자기 치밀하고 재미있는 영화로 탈바꿈한다. 적어도 샘이 유치장에 갇힌 토니와 만나 이야기를 하는 장면부터는 확실히 그렇게 된다. 먼지가 조용히 흩날리는 감방 안에서 대치하는 샘과 토니를 잡아낸 화면은 끝내주며, 관객들은 비로소 전반부에 나타난 모호한 사건과 장면들을 짜 맞출 수 있게 된다. 등장인물들이 어떤 큰 그림 안에 들어와 있는지가 여기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갑자기 궁지에 몰린 샘은 도주하고, 이 도망은 이 영화 제일의 명장면, 매표소에서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샘이 덫에 걸린 쥐처럼 적들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 장면의 스릴이 대단하기 때문에, 그 뒤에 펼쳐지는 샘과 토니의 화려한 대결이 오히려 약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때쯤 되면 전반부와는 달리 적들이 무엇을 꾀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가 바로바로 드러나는데, 그러한 계략들 역시 관객에게 강한 전율을 안겨준다. 이 영화의 스타일은 앞부분과 뒷부분이 많이 다른데, 전반부의 폭력은 사실적이며 잔혹한 반면 후반부의 액션들은 화려하고 다소 양식적인 면도 있는 것 같다. 샘과 토니의 대결은 수많은 거울을 이용하여 펼쳐지는데, 이것은 마치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오마주인 듯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이 씬을 통해 샘이 살아남기 위해 토니를 모방하고, 그로 인해 토니와 비슷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면이 바로 샘의 정체성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장면만 봤을 때는 [상하이에서 온 여인]에서 가져온 것 같지만 영화 전체를 놓고 보면 오손 웰즈보다는 앞서 말한 대로 히치콕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다.
[암화]를 스릴 넘치는 영화로 변모시키는 것은 누명 쓴 사나이라는 주제지만, 사실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주제는 정체성의 혼란이다. 영화 초반 샘의 등장부터가,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계산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면 나레이션을 통해 지금까지 마카오 암흑가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고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지가 드러나는데, 이 나레이션은 곧 샘이 K를 만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암흑가의 보스인 K를 만나고 그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부탁을 듣는 것을 보면 샘은 영락없는 암흑가의 인물 같은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샘이 다른 경찰들에게 팀장으로 깍듯한 대접을 받으며 범죄 현장을 휘젓기 때문에 관객들은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저 사람이 경찰이었어? 더 의아한 것은 이 영화에서 경찰과 범죄자는 별다른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샘은 암흑가의 인물인 ‘뚱보삼촌’(왕천림)과 그의 조카(임설)가 헛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의심되는 용의자를 고문하는 현장에 찾아간다. 그때는 이미 영화 속에서 샘이 경찰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뒤다. 샘은 용의자의 손톱을 뽑고 그 자리를 떠나며 뚱보삼촌의 조카에게 “입 열든 말든 손톱 다 뽑고 죽여.” 라고 말한다. 이러한 면이 이중으로 관객들에게 충격을 준다. 샘뿐만 아니라 샘의 부하들도 시민들에게 무례하며 폭력적인데, 이들은 경찰인가, 아니면 범죄자인가?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설정은 이 영화의 도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뚱보삼촌의 ‘조카’는 사실은 조카가 아니라 아들임이 드러난다. 이런 정체성의 혼란은 역설적인, 굉장히 통렬하고 강력한 결말로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논리적으로 여겨질 정도라는 점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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