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

영웅본색 (英雄本色; A Better Tomorrow, 1986)

영웅본색 (英雄本色; A Better Tomorrow, 1986)

감독 : 오우삼

각본 : 진경가, 오우삼, 엽숙화

출연 : 적룡, 장국영, 주윤발, 주보의, 이자웅, 증강, 석연자, 전풍, 성규안

특별출연 : 서극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웅본색]을 극장에서 다시 봤다. 첫 장면을 보고 몹시 놀랐는데, 이런 장면도 있었나 싶었던 것이다. 송자호(적룡)가 동생 송자걸(장국영)이 총에 맞아 죽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를 처음 본지 10년이 훨씬 넘었으니 첫 장면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첫 장면 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가 그동안 생각해오던 것과 많이 달랐다. 기억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문제일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유명한 영화이니만큼 줄거리를 길게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홍콩의 위조지폐갱단에 몸담고 있는 송자호는 동생 송자걸을 생각해서 손을 씻으려 하지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해 대만에서 체포되고, 그의 아버지인 송경문(전풍)도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송자호의 동생인 마크(주윤발)는 복수를 하고 총에 맞아 절름발이가 된다. 3년 뒤 대만의 감옥에서 출옥한 송자호는 홍콩으로 돌아오지만 자걸은 그를 원수처럼 대하고, 조직을 장악한 그의 옛 부하 아성(이자웅)도 송자호를 괴롭힌다.

줄거리를 돌이켜 봐도 그렇고, [영웅본색]은 당연히 자기를 배신하여 감옥으로 가게 만들고, 출소한 뒤에는 손을 씻지 못하게 괴롭힌 옛 부하에 아성에 대한 송자호의 복수극, 그리고 복수를 향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손 맞잡고 걸어가는 사나이들의 우정 이야기려니 하고 관람했는데 완전히 틀렸다. 홍콩으로 돌아온 송자호는 과거를 씻어버리고 동생과 화해하는 데만 관심이 있으며, 그가 자신을 배신한 게 아성이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송자호와 거래하던 대만의 조직은(물론 조직을 차지하려는 내부의 음모가 끼어든 일이었지만) 아성과 손을 잡고 송자호를 배신하는데, 송자호는 경찰에게 쫓기던 중 네가 날 배신했느냐며 아성에게 잠시 총을 겨누기도 하지만 자신이 배신했으면 왜 아직 남아있었겠느냐는 아성의 말을 믿고 총을 치운다. 게다가 자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주기까지. 아성의 배신에 대한 설명은 아성이 요 선생에게 하는 단 한마디로 끝난다. “내가 전에 송자호를 팔아먹었는데 이제 와서 그깟 놈(송자호)이 두렵겠느냐.” 송자호에게는 오히려 과거의 배신보다는 아성이 마크 및 자걸을 건드리고 자신이 손을 씻지 못하도록 괴롭힌 것에 대한 분노가 더 컸을 텐데, 그의 행동을 보면 분노나 복수보다는 마크에게 자신의 몫을 돌려주고 동생을 안전하게 만들려는 마음이 더 강해 보인다. 마크 역시 아성에 박대를 받았으면서도 그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을 강하게 품고 있지 않다. 마크는 송자호에게 아성을 털자고 하면서 형을 3년이나 기다렸던 건 내가 잃어버린 걸 되찾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고 말한다.

송자호와 마크가 아성에게 복수하려는 뜻을 크게 품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미 세상에서 밀려난 인물들이며, 그 사실을 자신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아성을 죽인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송자호의 대사를 보라). 송자호가 처제인 재키에게 말했듯, 그는 홍콩에 남아있고 싶어 했지만 그곳이 송자호와 마크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임은 분명하다. 송자호는 자신이 일하는 연합택시회사에 쳐들어온 아성의 부하들을 물리친 뒤 마크와 함께 대만에서 온 형사를 피해 달아나는데, 두 사람은 야산에서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며 숨을 돌린다. 그러면서 마크가 말한다. “홍콩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 오래 못 가니 아쉬울 뿐이야.” 여기서 이 대사는 홍콩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마크의 처지뿐만 아니라, 오래잖아 중국에 반환될 홍콩의 운명, 그 운명을 기다리는 홍콩 사람들의 심경과도 절묘하게 겹치고 있다. 세상은 변했다. 세상에서는 의리가 사라진지 오래 됐고, 마치 강호의 무사 같이 의리를 중시하는 송자호나 마크 같은 사람들은 아성 같은 악인들에 밀려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홍콩은 중국에 반환된다. [영웅본색]의 주제가인 당년정(當年情)도 그런 정서를 담고 있는 것 같은데, 영화 홍보물에 소개된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두운 밤은 지나고 다시 해가 떠오르네

영웅은 이미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네

사나이로 태어나 무엇이 보람 있었나

의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나의 갈 길이었네

훗날 누군가 나를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영웅이 죽는 것은 오직 의리 때문이고

그것만이 의로운 죽음이라 말하고 싶네

강호의 세월은 끝이 없는 것임을 나는 탄식하네

난 차가운 이곳에서 산자를 그리워하며

세상을 떠돌고 묵묵히 홀로 살아간다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생각한 것은, [영웅본색]은 영화 자체의 의의와 더불어 주윤발의 포즈나 제스처(위조지폐에 불을 붙여서 담배를 피우거나 성냥개비를 씹는 등)로도 유명한 작품이었는데 [영웅본색]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오히려 주윤발이 추한 몰골을 하고 있을 때 나온다는 것이다. 위조지폐갱단의 범행 증거가 될 테이프를 빼오기로 결심한 마크는 더러운 옷을 입고 갱들이 위조지폐를 만드는 아지트로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심한 구타를 당했기 때문에 그의 입은 퉁퉁 부어 있고, 얼굴에는 피도 약간 묻어 있다. 마크는 마치 노숙자 같이 보인다. 그리고 곧 마크와 갱들의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엄청나게 강한 것, 도저히 상대도 안 되는 것에 맞서 싸울 때의 결기와 처절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장면이다. 흔히 오우삼의 스타일로 이야기되는 유려한 쌍권총 사격, 날아다니는 비둘기 등은 이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마크는 쌍권총을 쓰지만, 그게 별로 두드러져보이지는 않고. [영웅본색]은 마치 백조의 노래와 같다. 백조는 죽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전설처럼, 무대에서 퇴장하기 직전의 사나이인 송자호와 마크는 뜨거운 함성을 지르고 사라지는데(한 사람은 감옥으로, 다른 한 사람은 저 세상으로), 그러한 면모가 액션을 통해서 잘 드러나는 것이 아마 이 장면일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웅본색]에서 또한 두드러지는 것은 길에 대한 대사가 여러 번 반복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송자호가 막 대만에서 출옥했을 때, 마크를 쫓는 대만 형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차에 태워주겠다고 하니 우리는 가는 길이 다르다며 송자호가 점잖게 거절하는 장면에서 나오고, 두 번째는 송자걸에게서 나온다. 그는 자신은 경찰이고 형은 조폭이니 우리는 길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다시 마지막 장면에서 송자호의 입을 통해 나온다. “아걸, 넌 잘못한 게 없다. 우린 길이 달라. 넌 바른 길을, 난 잘못된 길을 걸어 왔어.” 이 대사들을 보면, [영웅본색]은 길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은 뻗어있는 길을 따라 각자 다른 곳으로 가게 될 텐데, 송자호는 자신이 걷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길은 이상한 방식으로 합쳐지는데, 송자걸이 자기 형이 저지르는 또 다른 범죄의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형제는 완전히 화해하고 형은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웅본색]이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음악은 좋지만 너무 많이 쓰인다는 느낌이 들며, 장국영의 연기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좋지 않은 편이다. 게다가 장국영이 연기하는 송자걸은 아무리 20년 전이었다고 해도 지나쳐 보이는데, 중요한 증거가 담긴 쓰레기를 통째로 집안에 가져와서 집을 온통 어지른 뒤에, 그걸 아내에게 치우게 하고 자신은 샤워나 하는 꼴이라니. 게다가 송자걸이 형에게 품는 원한에는 분명히 출세가 좌절된 것에 대한 원망도 있고. 간혹 편집이 거칠게 된 부분도 눈에 띈다. 다리를 절던 마크가 멀쩡하게 무릎을 굽히면서 뛰어다니는 장면도 거슬리고. 하지만 분명히 촌스럽고 거슬리는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세월에 씻기지 않은 부분이 이 영화에 남아 있다. 그래서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현대의 한국에서 [영웅본색]이 리메이크 된다는 소식에 불안을 느끼는 것이며, 앞으로도 [영웅본색 2]와 [영웅본색 3]이 다시금 이런 방식으로 개봉을 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덧말. 송자호와 마크, 아성이 같이 술을 마실 때 나오는 노래는 구창모의 희나리를 번안한 곡 같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덧말 두 번째. 쇼브라더스 시절의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 맘씨 좋게 생긴, 머리 좀 벗겨진 아저씨가 영화계를 풍미하던 꽃미남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덧말 세 번째. 서극은 재키가 오디션을 보는 장면에서 심사위원으로 특별출연한다. 재키의 연주를 맘에 안 들어하다 나중에 봉변을 당하게 된다. 성규안은 [영웅본색 2]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역시 악당의 오른팔 역을 맡았다.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웅본색 - 英雄本色, 1986  (7) 2008.08.29
맹룡(2005)  (6) 2008.08.27
[번역] 반환 이후의 홍콩영화 BEST 10 (2)  (8) 2008.08.25
장강7호 - 長江7號, 2008  (7) 2008.08.22
[번역] 반환 이후의 홍콩영화 BEST 10 (1)  (8) 2008.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