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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의 결투>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 장철 감독의 영화세계

3월 21일 토요일 오후 5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장철 감독의 <심야의 결투 金燕子> 상영 후 오승욱 감독과 주성철 기자가 '장철의 영화세계'라는 주제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오승욱 감독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심야의 결투>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한 뒤 거의 5년만에 상영하는 것 같은데, 상당히 좋은 프린트로 봐서 기뻤고, 프린트 상태가 너무 좋으니 전혀 다른 영화같이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심야의 결투>는 주인공인 소붕(왕우)이 기녀인 미랑 곁에서 죽어가는 장면으로 끝날 수도 있었는데, 장철 감독은 거기서 영화를 10여분이나 더 끌고 가고 있고, 그래서 이 영화가 걸작이라는 것이다. 주인공이 완전히 파멸하는 과정을 장철은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장철 감독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로 스타가 된 왕우와 장철의 파트너십이 실질적으로 종결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뒤에 관객의 질문에 답하는 오승욱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영화가 왕우의 배우 및 감독으로서의 작품세계의 분기점이 되는 것 같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왕우가 자신의 갈 길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이후에 반영웅적인 특성과 신체훼손을 주특기로 하는 왕우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장철 감독의 굉장히 작은 사진이다. 작지만 임팩트가 있어서..)

오승욱 감독은 그런 점을 이야기한다. 관객들의 질문을 받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하고 이전에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에서도 한 이야기와 겹치는 부분이지만, 오승욱 감독은 이 영화를 한 무뢰한이 죽기 위해, 파멸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관객의 질문에 대해서는 이 영화에서 소붕의 삶은 부모의 복수를 한 이후에는 완전히 여분의 삶이 아니었겠느냐는 얘기도 하고, 고작 그리워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피비린내나는 살육극을 벌이는 주인공의 감정적, 그리고 사회적인 미숙함(소붕은 어렸을 때부터 살인 기술만 배웠고, 살인 이외에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이 없는 사내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왕우는 <심야의 결투>를 회고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야외 씬들을 일본 로케이션으로 찍었는데, 주인공인 소붕은 백마를 타고 다닌다. 그런데 그만 안장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장 없이 말을 타고 찍었는데 그게 사실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찍으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고 그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심야의 결투>는 <방랑의 결투 大醉俠>의 속편 격으로 제작되었는데 장철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인 예광에게 금연자라는 이름만 남겨두고 다 바꾸라고 말했을 정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여주인공인 정패패는 자신이 주연인 줄 알았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고 보니 주인공은 왕우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왕우와 정패패는 촬영이 끝나면 서로 흥, 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도 안섞을 정도였고, 둘이 서로를 증오하면서 영화를 찍었다는 것이다. 정패패의 장철에 관한 평가도 마찬가지로 좋지 않다.
복수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강대위가 칼을 많이 맞고 벽에 기대 서있다가 다시 싸우기 시작한다. 그때 강대위는 이미 죽은 것인데 다시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죽은자가 복수에 대한 원념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심야의 결투> 마지막 액션씬에서 왕우가 채찍을 든 자들과 싸우는 장면이 있다. 넷이서 채찍으로 왕우의 팔다리를 잡고 그를 빙빙 돌리는데, 그 시점에서 이미 왕우는 죽은 것이다. 그런 왕우가 다시 일어서서 적들을 죽인다. 장철의 영화는 죽은자가 깨어나서 칼을 휘두르는 원념의 영화고, 주성철 기자는 장철 영화가 가장 파워풀할 때 그런 것들이 나왔다고 지적한다. 주성철 기자는 장철 감독의 최고작은 금연자(심야의 결투)라면서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에서의 핸드헬드 카메라 사용을 지적한다. 나중에 마치 슬로우모션이 장철 영화의 전매특허처럼 인식되고 그게 오우삼 감독에게 전해졌다고 이야기되지만 사실 금연자에는 슬로우모션이 없다. 거의 다 헨드헬드지. 특히 금룡회 잔당들과의 마지막 결투는 거의 카메라가 땅바닥에서 움직이다시피한다. 주성철 기자는 이 영화에서 장철의 액션 연출이 최고조에 이른 게 아닌가 이야기하고, 오승욱 감독도 촬영이 핸드헬드 카메라에서 트래킹 카메라로 이동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카메라의 움직임과 액션 연출에 감탄하고 있다.

장철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심야의 결투>를 찍고 무협영화에 대한 흥미를 잠시 잃었다고 한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에서 <심야의 결투>에 이르기까지 줄곧 왕우와 영화를 찍어왔지만 <심야의 결투>에 이르게 되면 왕우가 너무 커서 통제가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에피소드에 따르면 장철 감독이 다른 사람들과 밥을 먹으러 갔을 때 식당에서 뭔가 쿵쿵하는 소리가 났는데 장철 감독은 바로 저기서 왕우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맞추더란 것이다. 왕우는 본인도 인정하듯 트러블메이커이자 사고뭉치였다. 앞서 말했듯 <심야의 결투>는 장철 감독에게는 왕우와 작별하는 의미가 담긴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정패패와 나열은 왕우에게 밀린 면이 있었는데, 장철 감독은 <심야의 결투> 이후 왕우를 빼고 정패패와 나열을 기용하여 다시 무협영화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본인이 말하듯 무협영화에 흥미를 잃은 상태에서 그 계획은 잘 되지 않았다. 장철이 액션영화에 대한 관심을 다시 회복한 것은 강대위와 적룡의 <사각>이었다. 장철은 <심야의 결투>에 단역으로 등장하는 강대위를 데리고 무협액션을 다시 찍게 된다.
정패패의 입장에서는 <방랑의 결투>가 성공한 이후 <심야의 결투>로 확고한 스타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걸 왕우에게 뺏긴 마당이라 장철에 대한 감정도 안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여러 인터뷰에서 호금전 감독의 인문학적 소양과 그에게 받은 긍정적인 영향을 언급하면서 상대적으로 장철을 깎아내리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호금전 > 장철이다. 그러나 다른 배우들(오승욱 감독은 그게 우마였는지 다른 배우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에 따르면 장철 감독도 굉장히 인문학적 소양이 높은 감독이다. 시서화 등에 대한 소양도 출중한 모양이었는데, <심야의 결투>에서 왕우가 기루 벽에 쓴 시는 사실 장철이 짓고, 그가 직접 벽에 쓴 것이다. 호금전의 인문학적 소양이 높다는 것은 확실하다. 호금전은 소설적 전통을 영화에 많이 갖고 왔으며 작품을 보면 추리소설에 영향을 받은 흔적도 보인다. 예를 들면 객잔 같이 한정된 공간 안에 인물들을 모두 모이게 한다는 것이라든지. 물론 장철도 김용이나 와룡생 같은 무협소설 대가들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다. 특히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김용의 <신조협려>의 영향 아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점이다. 장철이 영화계에 입문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일감이 별로 없었는데, 그때 그는 주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를 평하면서 <요짐보>나 <츠바키 산주로> 같은 영화를 걸작이라고 평했다는 것이다. 왕우는 회고하기를 장철이나 자신은 마카로니 웨스턴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오승욱 감독은 장철 영화의 웨스턴적인 성격을 지적하고 넘어가는데, <심야의 결투>의 경우 한편의 웨스턴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정말 많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소붕에게 금연자나 천하제일이라는 것은 어쩌면 핑계같고, 한번 사람을 죽여본 자가 피비린내를 쫓다 파멸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1950년대부터 웨스턴에서는 선과 악을 구분하기 힘든 반영웅적인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마카로니 웨스턴에서는 이런 요소가 더욱 강해졌고, <심야의 결투> 주인공은 나쁜 사람만 죽인다고는 하지만 악당이라고 볼 수 있다. 오승욱 감독이 장철 감독이 자기 식으로 무협영화에 웨스턴을 집어넣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60년대의 홍콩과 아시아를 웨스턴으로 성찰한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주성철 기자는 실제로 홍콩 비평가들이 장철 영화가 웨스턴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점을 지적한다. 장철이 <심야의 결투>를 만들기 전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 일본의 <자토이치> 시리즈가 홍콩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이는 그 전까지 흥행하던 007 시리즈를 압도할만한 정도였다. 이런 작품들의 영향이 장철 영화의 캐릭터에도 반영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에 끼친 <자토이치> 시리즈의 영향을 무시할 수가 없다. 또 한가지 지적할 점은 시나리오 작가인 예광의 존재인데, 장철 감독은 <심야의 결투>를 만들 때부터 예광과 작업하기 시작했다. 장철 감독이 금연자 영화에 자기 색을 내고 싶어서 그에게 금연자라는 이름 석자를 빼고 다 바꿔달라고 말했던 것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은데, 예광은 홍콩 영화의 거리에 손도장을 찍었을 정도로 홍콩 영화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 되었다. 예광은 SF나 추리에 재능을 보이는 작가였는데, 왕우가 짊어진 초현실적인 이미지에는 예광의 영향이 컸다.

왕우의 캐릭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자토이치, 가장 직접적으로는 아시아 최초의 액션 스타라고 할 수 있는 도시로 미후네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주성철 기자는 우리가 불운한 것은 일본 영화라는 이유로 도시로 미후네의 작품을 한동안 볼 수 없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이 한국 영화계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이다. 다만 왕우 캐릭터가 그들과 다른 것은, 유명한 평론가 데이비드 보드웰에 따르면 왕우는 부주의한 영웅이라는 것이다. 그는 전혀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심지어 <영웅본색>에서 주윤발도 풍림각에서 복수를 할 때는 화분에 총을 하나씩 숨겨놓는 주도면밀함을 발휘한다. 왕우 캐릭터에게는 전혀 없는 면이다. 그런데 그런 점이 오히려 왕우에게 감정이입하게 한다고 주성철 기자는 말한다.
왕우는 실제 세계에서도 무뢰한이었다고 한다. 왕우는 누군가 자기를 조금만 건드려도 참고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싸움을 벌였고 드롭킥의 명수였다고 한다. 그는 영화계의 사고뭉치였다. 왕우는 수영선수 출신이었는데 수영을 그만 두고 영화를 하게 된 계기도 경기에 출전했다가 심판 판정에 불복해서 수영장을 뒤집어 엎었기 때문이었다. 수영으로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왕우는 쇼브라더스에서 신인 배우들을 선발할 때 지원했다. 왕우와 나열이 쇼브라더스에서 선발한 배우 1기 출신이었다. 오승욱 감독은 강대위와 왕우를 인터뷰했던 얘기를 하는데, 강대위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당신들의 영화를 보면 당신들은 끝에는 다 죽는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그때 강대위와 적룡 등은 감독이 시키면 한다고 대답했지만 왕우는 반대로 영웅이란 게 다 이기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파멸적인 면이 보여야 영웅인 것 같다, 그렇게 말했다. 오승욱 감독은 왕우에게 질문했던 이야기를 좀 더 하는데, 왕우 자신이 감독했던 영화에서도 왕우는 무뢰한으로 나온다. <사대천왕> 같은 영화에서는 중국 최고의 권법은 36계 줄행랑이라고 말하며 적 앞에서 도망치는 추저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다른 영화에서는 신체훼손이 어마어마하다. (오승욱 감독이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왕우가 감독한) 어떤 옴니버스 영화에서는 세 개의 에피소드에서 주인공들이 세 번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다. <외팔이 권왕> 같은 영화에서는 눈까지 잃어버리고. 왕우는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아서 자기가 했다고 말한다. 감독쯤 되면 폼나는 건 남들한테 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흑호문> 같이 겨우 간판 하나 떼고 처절히 박살나는 건 어떠냐고 물었더니 마영정이 사실 그런 사람이었고 자기는 그런 쪽을 재미있어한다고 대답한다. 왕우는 좀 유별난 사람이다. 서른살 이전에는(그 후엔 어쨌는지 모르겠다) 식당에서 항상 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고, 싸움을 일삼는데다 가방에는 항상 총을 넣어서 가지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왕우라는 배우의 자기 파멸적인 캐릭터는 왕우 본인의 캐릭터에서 자기 파멸적인 요소들을 캐치해낸 것 아닌가, 오승욱 감독은 그런 생각을 한다.
왕우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정말 다양하고 재미있다. 일본에서 왕우가 <자토이치>의 가쓰 신타로와 함께 <외팔이 맹협>을 찍을 때 그런 적이 있었다고 한다. 왕우와 가쓰 신타로가 짜고 촬영장에서 땡땡이를 쳤다. 두 사람은 중국 음식점으로 달려가서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이후 왕우의 이야기는 50%는 뻥이겠지만 하여튼 그렇다. 두 사람은 술병이 식탁에 일렬로 늘어설 정도로 술을 마셨고, 너무 술을 마셔서 가게에 술이 다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자 왕우는 식탁에 있던 간장을 마셔보자고 제안했고 결국 두 사람이 간장을 마시다 가쓰 신타로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갔는데 병원 응급차까지 자신이 배웅을 해줬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들은 왕우라는 인간의 일면을 말해주고 있다.
오승욱 감독과 주성철 기자는 부천에 왕우가 왔을 때의 에피소드들을 서로 이야기한다. 주성철 기자가 본 왕우는 완전히 맨(Man), 아저씨였다. 그래서 주성철 기자는 약간 실망한 반면 오승욱 감독은 재미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왕우는 이소룡이랑 팔씨름해서 자기가 이겼다는 말도 했는데, 영화에서 자기 몸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았던 이소룡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반면 영화마다 자기 옷에 피칠갑을 한 왕우가 아직 살아있다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하여튼 왕우가 왔을 때 여러 매체의 기자들이 사진 촬영을 했는데 왕우가 포즈를 참 잘 취해줬다고 한다. 특히 여기자들이 요청하면 별걸 다 해주더라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여기자한테는 알통을 내밀고 자기 팔뚝에 매달려보라는 제스처까지 취했다고. 기자회견장에서는 자신이 아직도 젊다고, 자기는 아직도 동전을 허공에 네 개 던져서 따로따로 다 잡을 수 있다고 말하고는 기자회견 따위 상관없다는 식으로 그것에만 열중하는데, 한 여섯번까지는 세개만 잡고 한개를 놓치고 그랬다가(실제로는 세 개 잡는 것만해도 대단한 일이다) 7번째에야 성공했다고 한다. 주성철 기자는 왕우의 명함에 이름이 본명인 왕정권으로 쓰여 있었다면서 그 이름이 참 임팩트 있었다고 말한다(정권 正拳 아닌가).
성룡과의 에피소드도 있는데, 70년대 말에 성룡이 흑사회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성룡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왕우였는데, 왕우가 성룡을 재빨리 피신시키는 한편 흑사회와 교섭해서 그를 구해줬다. 그래서인지 <대복성>이나 <화소도> 같이 저기 성룡이 왜 나왔나 싶은 그런 영화가 몇편 있는데, 그게 바로 왕우 때문에 출연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오승욱 감독은 성룡 본인도 출연하기 싫었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흑객>에 출연한 일본 배우 구라다 야스아키의 에피소드도 있는데, 그가 처음 대만 영화에 출연할 때 흑사회에서는 중국어가 서투른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억지 계약을 하고 심하게 이용해 먹으려 했다고 한다. 그때 나서서 단칼에 상황을 정리해준 사람이 왕우였다. 구라다 야스아키에 따르면 촬영할 때 점심 시간이 되면 그때 왕우는 자기 세상이 온 것처럼 굴었다고 한다. 오후 촬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몇 시간 씩이나 점심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여튼 맘대로였다. 구라다에게는 왕우가 은인이었는데, 왕우는 구라다를 데리고 대만의 온갖 어두운 곳을 찾아다니면서 놀았다고 한다. 여자들 있는 집에 가기도 하고... 그때 왕우는 돈이 많았는데, 집에 있는 세숫대야도 금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은 왕우가 술에 몹시 취해서, 술김에 구라다에게 에메랄드 반지를 사줬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 후에 구라다가 왕우를 공식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왕우가 준 반지를 끼고 그가 알아볼까봐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결국 그 자리에서 당신이 준 반지를 끼고 나왔다고 말하자 왕우가 하는 말이 "그랬냐? 내가 워낙 남들한테 물건을 많이 사줘서 말이지."


(이소룡과 왕우. 오승욱 감독의 글을 보면 나중에는 서로 앙숙처럼 되었다고 한다)

주성철 기자는 장철 이후로 삼합회 같은 조폭 이야기가 홍콩 영화 안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때까지는 문파와 문파의 대결 같은 것들이 정석이었는데, 장철 감독의 <심야의 결투>를 보면 악역을 맡은 금룡회는 폭력집단이지 문파라고 볼 수 없다. <심야의 결투> 이후 장철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집단들도 마찬가지다. 주성철 기자는 기본적으로 삼합회나 갱스터 같은 현실적인 폭력집단의 이야기가 장철 감독의 영화에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의상으로 적과 아군이 구분되는 것도 장철 영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심야의 결투>를 보면 악당인 금룡회 집단은 대단히 눈에 잘 띄는 복장과 머리띠를 하고 돌아다닌다. 호금전 영화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데, 장철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영화는 홍콩 웨스턴이니까.
호금전이 충의에 영화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과 달리 장철은 거기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협의라는 것은 어쩌면 남자와 남자 사이의 윤리가 아니라, 억눌린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만든 규약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서 내가 죽으면 너도 함께 죽어야 한다는 식의. 협의라는 윤리가 나타나기 시작한 춘추전국시대는 사실 가장 배신이 많은 시절이었다. 오승욱 감독은 장철 감독이 과도하게 어용화된 협(俠)을 제자리로 돌린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에 따르면 장철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협에 대한 허무주의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가령 <대자객>은 섭정이 주군의 복수를 한 다음에 자살하는 영화지만 장철은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작품이 가미가제 영화로 가지 않도록, 좀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영화가 되도록 이끌고 있다. 장철은 명예와 충성 같은 애들의 생각을 어른들의 생각으로 돌려놓은 사람이 아닌가, 오승욱 감독이 정리하는 장철은 그런 것이다.
주성철 기자는 장철 감독이 홍콩 영화에 끼친 영향으로 삼합회라는 현실적인 악의 이야기를 들여온 것, 핸드헬드의 유려한 사용, 컬러 등을 꼽는다. 장철은 당시 홍콩 영화계에서 컬러를 가장 잘 쓴 감독이었고, 그의 등장도 컬러 영화의 시작과 함께하고 있다. 한국의 감독이자 제작자 신상옥이 <대폭군>에서 주인공에게 흰 옷을 입힌 것이 장철 영화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3인의 협객 邊城三俠> 같은 영화에서는 아예 왕우가 흰 갑옷을 입고 있다. 이런 점은 오우삼 영화는 물론 왕우의 영화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왕우가 이후에 감독하게 되는 <종횡천하>, <독행도> 같은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흰옷을 입고 있다. 원래 흰옷이란 적이 흘리는 피를 뒤집어쓰고 붉어지게 되어있다. 오승욱 감독은 한국영화 이야기가 나오자 당시 영화계가 신필름과 쇼브라더스의 긍정적인 의미의 한홍합작을 통해서 서로간에 좋은 영향을 많이 끼쳤다는 이야기를 한다. 한홍합작 영화란 각자 다른 연기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과 홍콩 배우들이 서로의 연기 스타일을 비교해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승욱 감독은 그런 의미에서 한홍합작 영화로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흑객>을 보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를 하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다음 영화 상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많은 질문을 받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