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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합작영화의 빛과 그림자



(영화제 포스터는 주성철 기자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3월 한달동안 기획전인 '장철과 홍콩남아들'을 진행하는 중이다. 3월 19일 목요일 8시에 장철 감독의 <흑객>을 상영했고, 영화가 끝난 후 부산국제영화제 조영정 프로그래머가 '한홍합작영화의 빛과 그림자'라는 주제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조영정 프로그래머는 목에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 상태에서도 활기차고 발랄하게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이끌었다. 다음 글은 조영정 프로그래머의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정리한 것이다(합작영화라는 단어와 한홍합작영화라는 단어가 구분없이 쓰이고 있지만 아래에 나올 합작영화라는 용어는 한홍합작영화를 가리킨다).

1960년대 쇼브라더스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사였다. 쇼브라더스와 한국 영화의 합작 관계는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쇼브라더스와 한국연예사에서 함께 만든 1957년작 <이국정원>이 최초의 작품이었다. 한국연예사라는 회사는 자유당 집권기 정치깡패이자 영화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임화수가 운영하는 회사였다. 전창근, 도광계, 와카츠키 미츠오 등 한국, 홍콩, 일본의 감독 세 명이 참여했는데 당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영화산업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개봉할 때는 와카츠키 미츠오 감독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이국정원>은 쇼브라더스에서 만든 최초의 이스트만 칼라 영화이기도 하다. 멜로드라마가 호조를 보이던 우리나라에서는 <이국정원>이 흥행에 크게 성공했으나 홍콩에서는 흥행에 실패했다. 계약상 홍콩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홍콩이 갖고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우리나라에서 갖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쇼브라더스 입장에서는 남는 게 없었고 당연히 실망했다. 당분간 쇼브라더스와 한국 영화계의 합작은 이뤄지지 않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 쇼브라더스는 신필름과 손을 잡게 된다. 한국에서 열린 9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감독상을 받았으며 <연산군>은 미술상을 수상했다. 쇼브라더스의 사장인 런런쇼가 이때 내한하였는데, 쇼브라더스 측에서는 동남아시아의 재능있는 영화인들을 끌어들여 함께 일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었다. 당시 쇼브라더스 영화의 주류는 무협영화와 궁중사극이었는데, 말하자면 궁중사극이라고 할 수 있는 <연산군>이 꽤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런런쇼는 신상옥 감독에게 같이 영화를 만들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만 당시 신상옥 감독은 한국 최고의 감독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자신을 감독으로 영입하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고 조영정 프로그래머는 말한다. 신상옥 감독은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에 제작자로서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1964년 쇼브라더스와 신필름의 첫번째 합작 영화인 <달기>가 제작되었다. 연출자는 임원식 감독이었는데, <달기>의 홍콩 프린트에는 감독이 신상옥 감독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홍콩에서도 신상옥 감독이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가 이전에 홍콩에서 개봉해서 흥행에 성공했으며 이 영화의 주연이었던 신영균도 홍콩에서 스타덤에 올랐다. <달기>를 포함하여 신필름과 쇼브라더스는 합작으로 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양측의 합작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에서 제작한 부분의 제작비는 신필름이 부담하고 홍콩에서 제작한 부분의 제작비는 쇼브라더스가 부담했다. 주연 남배우는 한국 배우, 주연 여배우는 홍콩 배우를 기용했으며 세트장에서 찍어야 할 부분은 거대 세트를 가진 홍콩에서 촬영했고 야외촬영은 한국에서 진행했다. 홍콩은 영토가 좁고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되어 자연을 찍기에 적당한 곳이 별로 없었다. 반면 한국에는 적당한 자연 환경이 있었고, 게다가 고궁에서도 영화를 찍을 수 있어서 사극을 찍기도 좋았다.

그러나 신필름에서는 사실 세트장에서 촬영하고 싶었을 것이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정권 시절에는 수도영화사라는 곳이 있었다. 수도영화사가 이승만 정권의 비호하에 성장했던 수도영화사는 이승만이 물러가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몰락하게 되었는데, 이 회사에서 갖고 있던 얀양촬영소는 신필름에서 인수했다. 그래서 신필름이 군사정권과 유착했다는 의혹도 받게 되는 것이다. 안양촬영소는 당시 아시아 최대규모의 촬영소라고 이야기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러나 영화 촬영 장소를 빌려주고 받는 대여료로는 촬영소를 운영하는 게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신필름에서 쇼브라더스와 손을 잡은 것은 아시아의 영화사들이 안양촬영소에서 촬영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쇼브라더스 역시 거대한 촬영소를 갖고 있었다(여담이지만 <권격>에서 마지막 대결이 벌어진 장소는 런런쇼의 개인 저택이었다고 한다. 개인 저택조차 세트장으로 써먹을 수 있다). 신필름과 쇼브라더스 양측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신필름과 쇼브라더스의 합작은 7편에 그쳤는데, 합작에 따른 문제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신필름과 쇼브라더스의 합작 영화가, 신필름이 주체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 중국의 문화나 역사를 다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현대물이었던 <여마적>은 예외에 속한다. 둘째, 합작 영화에 출연한 한국 배우들은 당대의 스타인 김진규, 신영균, 김승호, 남궁원 등이었는데 당시 제작 관행은 겹치기 출연이 상례였다. 그러나 쇼브라더스와 합작하는 영화를 찍을 때는 겹치기 출연을 할 수 없었고 한 편을 찍을 때 세 편 정도 찍을 출연료를 지급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 제작기간이 너무 길었다. 당시엔 편집까지 다 합쳐도 제작 기간이 한 달을 넘기는 영화가 많지 않았는데, 합작 영화는 보통 3개월, 길면 6개월까지 걸렸다. 게다가 제작 중에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기면 배우들이 다시 홍콩으로 가야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는 제작비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했고, 결국 신필름과 쇼브라더스 양측 모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사실 쇼브라더스는 한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뜻을 품고 신필름과 합작을 시도했지만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이어진 신필름과 쇼브라더스의 합작 관계는 1967년작 <마적>을 끝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한홍합작영화의 3기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는 일종의 변칙 합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이 유행했다. 당시 한국 감독들 중에는 <흑발>의 장일호 감독처럼 홍콩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있었다. 배우도 마찬가지여서 진봉진 같은 배우가 홍콩으로 진출했는데, 주로 조연급 배우들이었던 이들은 홍콩에 진출한 한국 감독이 찍는 영화에 주연 혹은 조연으로 참여했다. 당시의 제도에서는 한국 배우 2인 이상이나 한국 감독이 참가한 영화라면 그 영화는 합작영화로 인정되었으므로 영화사에서는 한국 감독이나 배우가 참여한 영화를 합작 형식으로 수입하는 일을 많이 했다(<흑객>에도 <죽음의 다섯 손가락> 등에 출연한 유명한 악역 전문배우 김기주가 야쿠자 중간 보스로 출연한다).
영화사들이 이런 이상한 짓을 한 것은 1967년부터 도입된 스크린쿼터제 때문이었다. 스크린쿼터제가 도입되면서 외국 영화 수입편수에 제한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합작영화는 한국영화로 인정되어 스크린쿼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수입영화쿼터제라는 제도는 한 영화사가 영화를 수출한 만큼 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했으므로 변칙 합작이란 당시 한국 영화사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쇼브라더스는 신필름과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왔으므로 한국 영화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화 수출 계약서 대신에 합작 계약서를 알아서 써주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쇼브라더스 입장에서는 돈을 받는 건 똑같았으니까. 이렇게 수입된 '합작' 영화는 한국어 더빙을 새로 입혀서 상영되었다.

이런 현실 아래서 일어난 씁쓸한 이야기 하나. 정창화 감독의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한국에서 합작영화로 수입되었고 <철권>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여 상영을 마쳤다(이 영화에는 김기주, 남석훈, 진봉진 등의 한국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다. 홍콩에서는 <천하제일권>이라는 제목으로 상영). 그리고 얼마 후에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미국으로 수출되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외신으로 이 소식을 접한 한국 언론들은 홍콩 영화가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데 우리나라 영화도 할 수 있다면서 열변을 토했다. 더군다나 그 영화가 알고보니 한국 감독이 만든 거라는 사실이 새로 알려지면서 언론을 더욱 흥분하게 했다. 그러나 한국 언론에서는 이 영화가 제목을 달리해서 한국에서 개봉을 마친 영화라는 사실은 끝까지 몰랐다. 언론에서는 당시 국내 개봉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국적불명의 저질 액션 영화라고 혹평했었다. 한홍합작영화를 보는 시선에는 이런 이중잣대가 존재했다.

장철 감독의 <흑객>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안양영화사와 합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안양영화사는 신필름의 자회사였고, 합작계약으로 수입된 대부분의 영화는 안양영화사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안양영화사 외에 신아영화사도 합작영화를 많이 들여왔는데, 이 영화사 역시 신필름의 자회사였다.  그러니 대부분의 한홍합작영화는 신필름의 자회사에서 수입한 셈이 된다. 당시에는 인기가 높았던 장철의 이름을 빌어서 장철이 감독하지 않은 영화도 마치 그가 찍은 것처럼 상영하는 경우도 있었고(한 관객의 지적에 따르면 <생사투>가 이런 경우였는데, 그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사실 장일호 감독이었다고 한다) 다른 식으로 관객들을 속이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경우는 정말로 위장합작인 셈이다. 그러나 공동제작으로 반반씩 만드는 것만이 합작이 아니다. 가령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 같은 경우는 한일합작영화로 제작은 온전히 한국 쪽에서 맡았는데, 당시엔 요새 시행되는 이런 형태의 합작도 위장합작이라고 불렀으며, 영화를 같이 만들지 않으면 결코 진짜 합작이 아니라는 고정관념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런 건 관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합작영화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근래에도 영화계에서는 합작이라고 하는 대신 공동 제작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는 조금 더 예민하고 복잡한데, 가령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영국영화인가, 인도영화인가? <트레인스포팅>으로 유명한 영국인 대니 보일 감독이 만들었기 때문에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를 영국영화로 생각하지만 인도에서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아카데미에서 시상했을 때 인도 영화의 쾌거라고 굉장히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위장합작 영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게 아니다. 사실은 위장합작 영화가 정말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홍합작영화에 대한 비난은 새로운 시도를 꺾고 거기에 기울인 노력을 간과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었다. 70년대 합작영화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하나는 국적불명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폭력성 때문에. 종합하면 무국적 저질 액션영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런 합작영화를 사랑했다. 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가장 좋은 흥행기록을 남긴 영화 10편을 추려보면 그 중에서 합작영화가 넷, 다섯 정도 된다. 합작영화는 여러 가지 비난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사랑받았다. 당시 위장합작 영화 중에서는 클로즈업으로 얼굴이 나오고 롱샷으로 액션 장면을 찍는데 알고보면 클로즈업의 얼굴은 한국 배우, 롱샷의 액션 장면은 홍콩 배우가 찍은 홍콩 영화라는 식의 속임수 같은 것도 몇 개 있었다. 반대로 한국 영화를 홍콩 영화로 광고해서 개봉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국 영화였다면 절대 관객이 들어오지 않았을 영화가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 있었다. 특히 이런 속임수는 70년대 말에 성행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홍콩 영화계에서 여배우들이 차지하는 위치인데, 그때까지 홍콩에서는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주된 동력이 여배우였다고 한다. 여배우가 최고였고, 그래서 쇼브라더스가 신필름과 합작을 할 때도 주연 여배우 자리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필름과 쇼브라더스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선 것은 <대폭군>을 찍을 때인데, 홍콩 버전에서는 주연 여배우가 리리화였고 한국 버전에서는 주연 여배우가 최은희였다. 어떻게 찍었느냐면, 한쪽 여배우가 어떤 장면의 촬영을 다 마치면 다른쪽 여배우가 그자리에서 똑같은 장면을 찍는 식이었다. 조영정 프로그래머는 당시 촬영장에서 주연 여배우 두 사람과 스탭들이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하필이면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 못했는데, 두 사람 모두 여왕같이 보였던 모양이다.

1. 조영정 프로그래머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에는 홍콩 관객들이건 한국 관객들이건 영화를 통해 이국 풍경을 맛보고자 하는 욕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흑객>에 일본의 거리의 모습을 오랫동안 잡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 대해서 조영정 프로그래머는 <권격>의 첫장면도 그랬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초원 감독의 경우. 초원 감독은 편집이나 특수효과를 이용한 기교를 중시하지, 장철 감독처럼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로 롱샷으로 액션씬을 찍는 그런 일은 잘 안하는 감독이다. 그런데 그가 한국 로케이션을 통해 촬영한 <다정검객무정검>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벌판에 눈이 가득 쌓인 상태였는데, 이 벌판을 말을 탄 채로 터덕터덕 걸어가는 적룡에게로 카메라가 좀처럼 접근하지 못한다.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랬던 것이다. 홍콩에서는 그런 풍경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2. 이번 영화제는 부산아시아필름아카이브에서 소장하고 있는 쇼브라더스 영화의 필름들을 상영하는 것이다. 다만 <흑객>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결말 부분을 비롯한 마지막 부분이 몇 군데 삭제되어 있다.

3. 쇼브라더스사에서 다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만간 그 결과물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