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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두기봉의 은하영웅전(銀河英雄傳) - 1

 

이 글의 출처는 이 곳 입니다.

2006년에 쓰여진 글이라 그때가 기준입니다.

본문에서 '굳이' 영어단어(영어 스펠링)로 표현한 부분은 그대로 옮겼습니다.

또 큰 소제목 단어도 되도록 그대로 옮깁니다.

역시 되도록 영화 제목을 우리말 제목으로 하려고 했지만 부주의하게 지나친 부분 많을 듯 합니다.

허접한 능력으로 인한 오역에 대한 부분은 선뜻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되도록 양해를 구하며 댓글로 수정할 부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두기봉이 만든 제작사 밀키웨이의 중국어 이름 은하영상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또 무선영상은 홍콩의 방송국 TVB를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문제가 될 시 언제든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기봉의 은하영웅전(銀河英雄傳) - 1


「두기봉의 은하영웅전(銀河英雄傳)」 이란 특정 제목은 진정한 영화광을 위한 것이다. 대중들 눈에 두기봉은 하나의 수수께끼이고, 엄청난 매력을 가진 암흑가의 대부라는 걸 우리는 믿고 있다.


혹은, 내가 대담하게 한마디 더하자면, 진정한 홍콩영화광을 위한 것이다.(만약 당신이 《창화 ; 더 미션(槍火)》, 《암전》 아니면 《PTU》 중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1996년, 두기봉은 당시 TVB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위가휘(韋家輝)를 끌어들여 은하영상(밀키웨이: 이하 은하영상으로 지칭; 銀河映像)를 창립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10년이 흘렀다. 10년 간, 아마 모든 홍콩 영화인들이 인정하겠지만, 대다수 홍콩 감독은 대륙에 용입됬고 합작 영화만이 유일한 출구였다. 그러나 정통 홍콩 영화 제작을 고수하는 은하영상은 차례로 암흑가 영화 계열의 《암전》、《암화(暗花)》、《PTU》、《흑사회(黑社會)》와 《니딩 유; 고남과녀(孤男寡女)》、《러브 온 다이어트; 수신남녀(瘦身男女)》같은 흥행 영화를 발표했다. 홍콩영화의 쇠퇴(홍콩영시박람회(香港影視博覽會)는 2005년에 20여 편이 있었고, 올해(2006년)에는 더 적어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속에서 10년 된 제작사 ‘은하영상’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올해는 《흑사회 2;이화위귀(以和爲貴)》、《문작(文雀)》、《방축(放逐)》、《근종(跟踪)》 - 4편의 순수한 정통 홍콩영화를 발표할 계획이다.


은하영상은 기적이라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다. 최초의 검주편봉(劍走偏鋒) 한 풍격화 된 영화에서부터 흥행과 비평 양 방면에서 성공한 우수한 영화 제작사인 그들의 길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


두기봉은 누구인가?


바로 세 번이나 금상장 시상식에 불참한 사람이다. 그러나 금상장은 여전히, 이 거대한 사내에게 그 세 번 동안 최우수 감독상을 수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로 작년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서 상영된 《흑사회》를 통해 흑사회의 진실한 모습을 그린 사내이다.


바로 촬영 현장에서 ‘거친 입을 가진 종족’이라고 불리며 모든 스타와 스탭에게 욕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함께 영화를 찍고 싶어 줄을 선 감독이다.


앞으로 6가지 점에서, 당신은 은하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과 음미할 가치가 있는 그의 영화, 그리고 당신이 몰랐던 이면의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은 담배를 피우고 커텐을 열고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켤 시간이 있다.


아마도 당신에겐 담배 세 가피를 피울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은하 · 인물】   


대당가(大当家)

두기봉이란 두문자(頭文字)의 탄생   

두기봉 · 대작(1996-2005)   


《진심영웅(眞心英雄)》(1998) 《재견아랑(再見阿郞)》(1999) 《암전(暗戰)》(1999) 《창화(槍火)》(1999) 《고남과녀(孤男寡女)》(2000) 《랄수회춘(辣手回春)》(2000) 《종무염(鐘无艶)》(2001) 《전직살수(全職殺手)》(2001) 《수신남녀;러브 온 다이어트(瘦身男女)》(2001) 《암전2(暗戰2)》(2001) 《력고력고신년재(력咕력咕新年財)》(2002) 《아좌안견도귀(我左眼見到鬼)》(2002) 《백년호합(百年好合)》(2002) 《턴 레프트 턴 라잇;향좌주 향우주(向左走·向右走)》(2003) 《절대초인; 대척료(大只佬)》(2003) 《1:99전영행동(광상곡)(1:99電影行動(狂想曲))》(2003) 《대사건(大事件)》(2004) 《유도용호방(柔道龍虎榜)》(2004) 《용봉투(龍鳳斗)》(2004) 《흑사회(黑社會)》(2005) 《흑사회 이화위귀(黑社會以和爲貴)》(2005)


팽호상(彭浩翔 : <이사벨라>, <너는 찍고 나는 쏘고>의 감독) : 어느 날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침사츄이를 지나가는데 촬영하는 무리를 보게 됐죠. 뭘 찍는지 몰랐어요. 버스가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누군가 그 시끄러운 와중에 커다란 소리로 욕을 하고 있더라고요. 침사츄이의 공기가 온통 이 목소리에 메아리치는 것 같았죠. 아, 바로 알 수 있었어요. 두기봉이 영화를 찍고 있구나.


유청운(劉靑云 : 배우) : 80년 대, 전 홍콩 TVB 방송국에서 연속극 《설산비호(雪山飛狐)》를 찍고 있었어요. 호자(胡子)라고 불리는 기껏해야 두 세 장면 나오는 아주 작은 역이었죠. 제가 찍는 시간은 정오였어요. 그렇지만 화장하는 동안 9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도 찍으러 오라고 알려주질 않는 거예요. 스튜디오에선 액션씬을 찍는다는 것만 알고 있었구요. 대략 밤 한 10시쯤 돼서 안으로 들어가서 봤죠. 거대한 스튜디오 안에 한 사람이 앉아 있고, 옆에는 무술감독 정소동이 서있었어요. 그 사람이 너무나 조용하게 앉아서 보고 있는데 시가를 피우지도 않더라고요. 할 일도 없어서 그 사람 뒤에 서서 구경을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고개를 돌려 절 보더니 아무런 표정 없이, 심지어 제가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오늘 자네를 찾을 일은 없으니 돌아가도 되네.” 이게 저와 두기봉의 첫 번째 작품이었어요.


양가휘(梁家輝 : 배우) : 두기봉은 사실 제 사형입니다. 우린 모두 무선방송국의 예인훈련반에서 공부했으니까요. 두기봉은 주윤발과 같은 반 동기였어요. 그들은 3회였고 전 10회였는데 유덕화와 같은 반이었죠. 두기봉도 연기를 공부했어요. 과정이 지날수록, 선생님은 알 수 있었어요. 주윤발은 일류배우가 될 수 있지만, 두기봉은 아마 삼류배우 쯤 될 수 있단 걸. 그러니까 자네 조감독이 돼서 바쁜 감독을 도우면서 먼저 공부를 하는 게 어떻겠나 라고 한 거죠. 두기봉은 즉시 가서 조감독이 됐어요. 그래도 그 기간에도 임영동(林岭東:<용호풍운>, <감옥풍운> 감독)과 함께 단역을 했었어요. 관가의 포졸을 연기하는 데, 관리가 막대기를 두드리면 그 둘은 커다란 몽둥이를 가져와서 아래턱을 내리고는 고함을 치죠. 위풍당당하게! 그 후 오랫동안 두기봉을 만난 적이 없었어요. 그러다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대감독이 돼있더군요.


불참


2006년 4월 8일 저녁, 25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 홍콩의 홍관에 명사들이 운집했다. 최우수 작품상을 발표할 때, 이 가장 중요한 상에 위엄을 부여하기 위해 집행부는 특별히 홍콩, 대만, 대륙에서 온 세 명의 실력자-성룡, 허우 샤오시엔, 황건신(黃建新)-더러 두기봉에게 시상하게 했다. 그러나, 최우수 감독상과 마찬가지로 두기봉은 불참했다. 사실 두기봉은 이미 3번이나 금상장에 불참했다. 이에 대해 확실하지 않은 소식통에 의하면, 첫 번째 불참 때 시상식 사회자 문준찬문(文雋撰文)이 두기봉에게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 후, 두기봉은 다시는 참석하지 않았다. 매번 말하는 이유는 전부 사실이다. “나는 영화를 찍느라 바쁩니다.”

시상식 다음날 홍콩 신문에 실린 트로피를 품은 두기봉의 사진은 무척 젊어보였다. 자세히 보면 하단에 설명하는 글자가 보인다. “두기봉 감독이 금상장에 불참하여, 1999년 <창화>로 처음으로 감독상을 탔을 때 사진으로 대체함.”


심부름꾼


1972년, 홍콩 구룡성에서 성장한 두기봉은 홍콩 무선 방송국에 와서 심부름꾼이 됐다. 그해 17살이었다. 두기봉을 잘 알고 있는 유청운은 이에 대해 나에게 특별히 해설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집배원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심부름꾼이었는데 저희는 통상 office boy라고 불렀죠. 방송국에는 엄청 많은 사람들이 모두 office boy 출신이고 저도 그 중 하나였어요.”


당시 무선 방송국은 홍콩 영화의 소림사라고 불렸는데 적지 않은 영화 대가들이 모두 그 곳 출신이다. 1996년 성립된 은하영상은 더욱이 원년 멤버가 무선 출신이다. office boy인 두기봉은 나중에 3회 홍콩 무선의 예술 배훈반에 참가해 주윤발, 임영동과 동학이 되었다. 일련의 훈련을 거친 후 교사는 학생들을 몇 종류로 구분했다. 두기봉의 사제 양가휘의 말을 들어보자.


“선생님은 알 수 있었죠. 그 회 학생에서 주윤발은 일류가 되겠지만, 두기봉은? 아마도 3류 정도일 거라는 걸. 두기봉한테 감독을 돕는 조감독이 되어 우선 배워보라고 했었죠.”


두기봉과 임영동은 즉시 조감독이 되었다. 이 전에, 두 사람은 몇 편의 연속극에 병졸로 출연했다. 양가휘 말로는 심야 방송국에서 방영되는 옛 작품에서 그들 둘을 보곤 하는데 웃겨 죽을 것 같다고 한다.


“관가의 포졸을 연기하는 데, 관리가 막대기를 두드리면 그 둘은 커다란 몽둥이를 가져와서 아래턱을 내리고는 고함을 치죠. 위풍당당하게! ”


두기봉은 조감독이 된 후, 그런 미친 듯한 작업 분위기에 급속도로 융화되었다. 지금에 와서 회고해보면 그는 항상 말한다.

“전 당시 무척 힘들었어요. 통상 한 달에 40시간도 못자서 일을 마치면 서서도 잘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조감독 업무에는 모든 것이 포괄돼 있었다. 장소 선택, 시간 연기, 복장 관련....각본이 불완전 했을 땐 심지어 각본 수정까지 도울 정도였다. 양가휘의 말을 빌면 "이런 일은 엄청난 속도로 방송국의 모든 작업 과정에 익숙해지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 왕천림(王天林)의 조감독이 된 두기봉은 어떻게 촬영과정을 지도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드라마를 찍을 때, 누구나 출입했어요. 어쩔땐 늦고 어쩔땐 지각하고. 왕사부는 너무나 침착하게 즉시 안배했죠. 이건 무척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두기봉의 마음에는 밑그림이 있었다.


‘난 반드시 이런 환경에서 성장할 걸 안다. 분명 십년도 아니고, 3년 안에 기회가 올 것이다.’


당연히 현실은 젊은 두기봉의 상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