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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뉴웨이브란 성난 파도 속의 허안화

며칠 전에 <객도추한>을 봤어요. 허안화 감독의 작품 중에서 가장 보고 싶던 영화였죠. 4월에 열리는 홍콩 금상장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에 허안화의 <천수위의 낮과 밤>이 후보에 올랐습니다. 제가 가는 홍콩 영화 게시판 글 대부분은 <천수위> 편이더군요. 다시 <객도추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영화를 다 보고 구글을 뒤졌습니다. 인터뷰도 읽고 싶고 자료도 더 찾아보고 싶고. 홍콩 영화에 관심있을 때부터 참 익숙한 이름인데도 전 허안화의 작품을 본 거라고는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 밖에는 없어요. 분명 동시대 감독인데도 뉴웨이브란 간판만 기억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더군요.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와 <객도추한> 모두 참 좋았어요.
찾아낸 자료 중에서 두 편의 원문을 섞어서 번역해 올립니다. 주된 글은 [허안화: 난 심각하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다]이고, 이 글에 붙게 된 부연 글은 [허안화 : 뉴웨이브란 성난 바다에 위탁하다] 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단순 감상을 위해 거칠게 해석된 글이며 문제가 발생시 언제든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이하 이모)>를 감상한 김용은 제목을 <상해의 이모>나 <이모의 투자>로 바꿀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전자는 줄거리만 반영하고 있고 후자는 이모 삶의 단편적인 부분일 뿐이다.

각본을 쓴 이장(李檣)은 여전히“포스트모던 라이프”가 적절하다고 느낀다. “포스트모던 라이프란, 마치 현재의 유행처럼, 상의는 솜저고리를 입고 하의는 청바지를 입는 게 제일 맞는 지금이듯이 가장 뒤섞인 그런 감각”이다.

<이모>는 이런 감각을 설명 - 누군가 오고 뛰어오고 또 돌아오고 갑자기 다시 부딪친다 - 한다. 이게 바로 허안화가 보는 ‘포스트모던’이다. 모두들 “이런 상황 속에서 계속 일을 만들고 길을 찾아간다.”

비록 <이모>의 자전적 성격을 부인해도, 허안화는 ‘이모’의 마음을 절실하게 이해한다고 느꼈다. 영화의 이모는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욕하고, 현실의 그녀 역시 종종 줄 서지 않는 사람을 욕한다.

허안화는 6, 70년대 히피․이상주의․반 물질주의 같은 문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평화를 믿고 고생과 소박함을 받들고 평등과 청렴을 주장한다. 21세기에 들어서자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고 “나이가 드니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 모르겠다.”


대작 이전 시기

1990년 허안화는 반 자전적 영화 <객도추한>을 만든다. 감독 본인과 일본인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이 반 자전적 영화에서 타향에서 떠도는 인생을 돌아본다. 허안화의 모친은 일본인이고 동북 지역에서 국민당의 서기와 결혼했다. 허안화를 낳고 세 사람은 마카오로 이주해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허안화가 유아원을 마친 5살 때 홍콩으로 이주했고 조부모는 1959년 배를 타고 광주로 갔다. 요녕 안산에서 태어난 허안화의 할아버지는 중국 전통문화와 고전문학 방면에 조예가 깊어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허안화는 어릴 때부터 수없이 영화를 봤다. 그녀 본인이 기억하길 “7,8세부터 매주 영화를 봤다. 일요일엔 만화영화를 봤고 연극도 보고 어쩔 땐 광동어 흑백 영화를 봤다. 영화보기를 멈춰본 적이 없다.”

<이모>의 전반부는 상해에서 발생한 일을, 후반부는 안산으로 돌아간 후의 사건을 그리는데, 외부 모두 허안화가 이를 빌려 고향을 그리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녀는 이는 절대 심각하게 고려된 게 아니라고 한다. 당시 그녀가 안산을 떠날 때 겨우 2개월이었으니 기억은 전무하다. 디자이너가 골라온 로케이션 장소는 중공업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60년 후 허안화는 스텝과 함께 안산으로 처음 돌아갔다. “내가 이곳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부모는 허안화가 이과에 갔음 했다. 당시 제일 전도유망한 직업이 의사와 변호사였다. 허안화의 이과 성적은 좋지 않았고 결국 홍콩 대학 영문과로 진학한다.

허안화의 학교 생활은 ‘모던’했다고 할 수 있는데, 1967년 그녀는 제일 먼저 콘텍트 렌즈를 낀 사람 중 하나였다. 당시 허안화의 머리는 어깨를 덮었었지만 다리가 두꺼웠기에 당시 유행한 몸에 꽉 끼는 짧은 치마는 입지 않았다. 1, 2년이 지나 학교에서 히피풍이 유행했다. 허안화 역시 인도풍 장삼을 입고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었다. 

허안화는 학교 극단에서 도구를 관리했고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그녀가 가장 득의만만했던 일은 자신이 만든 포스터였다. 다른 학생들은 여전히 글자만으로 선전지를 만들었지만 그녀는 잡지의 그림을 덧붙여 원하는 효과를 연출했다. 그녀의 포스터는 학교에서 무척 유명해졌고 “그들이 부탁했기에 내가 만들어줬다.”

1975년 허안화는 첫 번째 일을 맡는다. 호금전 감독의 영어 보조로 청소같은 잡일도 포함한, 비서와 유사한 일이었다. 3개월 후 호금전의 무협물 <협녀>가 칸 영화제에서 기술대상을 받게 되자 그는 칸에서 2, 3주 머무르게 된다. 할 일이 없어진 허안화를 부친은 TVB 고위층에게 데려간다. 허안화에게 만족한 방송사는 그녀에게 제안한다. 만약 방송사로 온다면 다음 주에 즉시 차를 주고 스텝을 배치해 촬영을 시작하게 하겠다고.

허안화는 진짜로 차와 스텝을 가지게 된다. 홍콩 TVB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매일 쉬지 않는” 생활을 보낸다. 당시 TVB는 아시아 텔레비전과 경쟁관계였는데, 아시아 텔레비전은 ‘10대 기안’을 찍자 TVB는 바로 ‘청렴위’를 찍는다. 허안화 역시 경찰과 홍콩의 기이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찍으며 홍콩의 허다한 거리를 돌아다녔다.

허안화는 방송국서부터 거의 다시는 치마를 입지 않았다. 간편을 위해 머리길이 역시 점점 짧아졌고 반년 후 그녀와 마주친 옛 친구가 깜짝 놀랐다. “왜냐면 난 15~20근은 살이 찐데다 입은 옷도 펑퍼짐했고 얼굴은 세수를 안 한 것처럼 꾀죄죄했다.”

“그들이 말하길 법칙이라고 했다. 방송국에서 견디다보면 살이 찌는데 만약 견디지 못하면 일을 그만둔다고 한다. 너무나 힘들어서 음식으로 자신을 위로하게 되고 무진장 먹게 된다는 거다.” 허안화는 무척 편안했다. “조만간 바뀔 테니 상관없었다.”

1978년 허안화는 TVB에서 3부작 <후자산하(獅子山下)>를 찍는다. 1년 후, 허안화는 “대작을 찍기 시작한다.”


영화라는 성난 바다에 의탁하다(投奔電影的怒海)


1978년, 홍콩에서 갑자기 TVB 연출가가 영화를 만드는 분위기가 성행한다. 엄호(嚴浩)가 첫 번째였고 뒤이어 서극도 <접변>을 찍는다. 허안화 역시 영화를 찍고 싶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호금전의 <공산영우>에 투자한 사장을 찾아가라고 말한다. “만약 그들이 호금전에게 투자할 수 있다는 건 그들에게 돈이 있다는 의미이고 또 치밀한 제작을 좋아한다는 의미였다.” 과연 상대방은 시원스레 그녀에게 이듬해 3월에 촬영을 시작하자고 했다.


그러나 허안화의 시나리오 작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때 까지 기다리자 석 달이 남았을 뿐이었다.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았고, 작가는 땅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쩜 난 이렇게 멍청할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는 건데.”

허안화는 시나리오 작가와 시나리오를 다시 쓰기로 결정한다. 당시 허안화는 로만 폴란스키를 좋아했고,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심령물의 맥락에 따른 기이한 일을 개편해 공포물을 만들었다.

허안화는 이렇게 첫 번째 영화 <풍겁>을 완성한다. 이 작품은 서극의 <접변>과 함께 홍콩 뉴웨이브의 대표작이 된다.

“<풍겁>의 구조는 복잡한 이야기보다 뛰어나다.”허안화는 <풍겁>을 무척 좋아한다. 그녀는 구성 면에서 <풍겁>이 <투분노해>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평한다.


<투분노해>

<투분노해>는 원래 감독으로 엄호를 희망했다. 베트남 난민 이야기이지만 베트남에서 촬영할 방법이 없었다. 배우 하몽(夏夢)은 월남과 분위기가 비슷한 해남도를 추천했다. 그러나 당시 타이완 규정 상, 대륙에서 촬영한 작품이나 배경을 취한 사람은 일률적으로 활동을 금지당했다. 타이완은 홍콩 영화의 주요 시장이었다. 당시 <수렴청정(垂帘听政)>을 찍은 양가휘는 대만에서 활동을 금지당해 3년간 작품을 하지 못했다. 엄호는 타이완에서 활동이 금지될까 두려워 거절했다. 기회는 허안화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무척 좋아하며”, 재빨리 허락했다. 당시 그녀 외 모든 스텝은 전부 가명을 썼다. “나중에 나는 내가 옳았다고 느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내 최고 작품으로 공인되는 영화를 찍을 수 없었을 거다.”

그녀는 주윤발을 찾아갔다. 그가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했지만 주윤발은 망설였다. 타이완 시장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후에 촬영감독 종지문은 유덕화를 추천한다.

당시 20살의 유덕화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었고 막 첫 번째 영화에서 작은 조연을 연기했었다. 유덕화 역시 타이완 시장이 걱정 돼 주윤발을 찾아가 상의했다. 주윤발이 반문했다. “너한테 지금 타이완 시장이란 게 있어?” 유덕화는 작품에 출연했고 결국 2회 금상장 최우수 신인상 후보에 오른다.

유덕화의 외형적 문제 해결 위해 조형사는 그의 머리칼을 짧게 잘랐고 그를 삼아(三亞)로 데려가 3시간 가량 햇볕을 쬐게 해 살을 태웠다.




<투분노해>에 300만 홍콩 달러가 투자됐지만 1600만 홍콩달러를 벌어들였고 홍콩 뉴웨이브의 클래식으로 추앙되었다. 이 작품은 허안화의 <호월적고사>와 텔레비전 작품인 <사자산하> 계열의 <내객(1978)>과 함께 허안화의 “베트남 3부작”을 이룬다. 또 5회 금상장에서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감독상 등 5개 부분을 수상했고 칸 영화제에도 참여했다.

유덕화는 <투분노해>를 찍을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다갈색 안경을 끼고 내 앞에 앉아 있는 하몽이 상냥스런 얼굴로 말했다. [유 선생, 이렇게 황급하게 찾아와 정말 미안허이, 까놓고 말해서 원래 주윤발한테 부탁했는데 거절하더군. 부득불 두 번째로 자네를 찾아왔어.] 24시간 내로 대답을 해야했는데 난 계속 주윤발이 왜 거절했는지 허안화에게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주제 넘는다 여길까봐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몽은 이발사가 날 추천했다고 했다. 또 종지문과 임자상도.”유덕화는 해남도에서 2개월 간 21개 장면을 찍으며, 허안화, 관금붕, 구정평 등과 친구가 되었다.

60년 대 쇼브라더스에서 시나리오를 담당한 구재안평 선생은 <투분노해>로 2회 홍콩 금상장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했다. 그의 진짜 이름은 구강건으로 쇼브라더스에서 <애노(愛奴)>, <사각(死角)> , <당조호방녀(唐朝豪放女)> 같은 작품을 썼다. 80년 대 후반에는 구재안평 혹은 재안평이란 이름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썼는데, 관금붕의 <지하정>, <연지구>, <완령옥> 같은 작품이 그의 것이다.

구재안평은 이렇게 회상한다. “70년대 말 홍콩으로 돌아왔을 때 허안화는 이미 대감독이었어. 당연히 <풍겁>의 성공 때문이었지. 1980년 허안화가 <호월적고사>를 준비하며 날 찾아와 후반부 시나리오를 완성해달라더군. 얼마후 <투분노해>를 한다는데, 허안화는 방송국 시절 베트남 소재에 관심이 비상했거든. 나한테 종이로 된 자료를 모두 건네주며 쓰라는거야. 이틀 뒤인가 밤에 날 찾아와 밥을 먹는데 우연히 시나리오 이야기를 했지. 그래도 완전히 내 맘대로 자유롭게 쓰게 했어.”


장애령과의 반생연(半生緣)

방송국 근무 시절 허안화는 장애령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고 싶어했다. 건의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장애령을 찍는 건 불가능 해. 그런 프로그램은 없었잖아.”

허안화는 장애령이 묘사한 홍콩을 좋아했다. “장애령이 쓴 홍콩이 내가 보는 홍콩이다. 그녀는 중국인과 외국인을 동일한 시점으로 묘사한다. 외국인을 외래자(外來者)로 묘사해 괴이하게 보이도록 만들지 않는다.”

1982년 허안화는 <경성지련> 촬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장애령의 소설은 사실 <반생연>이었다.

“영화로 만들기엔 <경성지련>이 <반생연>보다 적합했다. <반생연>은 너무 길어서 드라마로 찍어야했다.” 허안화가 사후에 내린 결론이다.

허안화는 범류원 역으로 주윤발을 캐스팅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주윤발을 “스타이면서 배우”라고 평한다. 문예물이나 무협물 모두 연기할 수 있었고 작업 태도 또한 좋아서 남에게 겸손하고 온화했다. <호월적고사>를 찍을 때, 촬영팀은 필리핀의 형편없는 상황에 기거했다. 한 방에 5명이 잤다. 주윤발은 방 안에 아무도 없을 때에만 침대에서 잤다. 매일 돌아오면 그는 두 명의 배우와 스텝 전부가 먹을 음식을 만들었다.

장애령의 판권을 얻기 위해 허안화는 송기에게 연락했다. 송기는 허안화와 주윤발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춘권을 대접했고, 그들에게 그 시대 남자들은 어떻게 앉는지 어떻게 서있었는지 설명했다. 또 송기는 주윤발에게 너무 심각하지 않고 좀 가볍게 연기하라고 충고했다.



장애령은 송기를 통해 허안화에게 편지를 팩스로 보냈다.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 되어 영광이고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시 허안화의 사정은 너무 바빠서 곤란한 지경이었고 회신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에 보관도 생각을 못했다. 이 팩스는 나중에 없어졌고 “그렇지 않았다면 경매에 팔 수 있었을 거다.”

허안화는 송기에게 촬영에 필요한 내용을 물은 적 있다.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걸 무척이나 후회한다. 송기는 <경성지련>이 꼭 남녀 한 쌍이 기지를 겨루는 희극같고, 꼭 40년대 희극이라고 했다.”

<경성지련>은 허안화가 최초로 흥행에서 실패한 영화이고 매스컴의 혹평도 굉장했다. “이 일을 겪었더니 이후에 더 큰 공격을 받아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느꼈다.”

1997년 허안화는 다시 장애령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 <반생연>은 대륙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홍콩내 흥행은 여전히 좋지 않았는데 “홍콩인은 느린 걸 싫어했다.”

현재까지, 허안화는 여전히 자신이 장애령 소설을 영화화 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느낀다. “영화적 형식으로 소설 속 의경(意境)을 표현하고 싶다. 그러나 어떤 형식인지 찾지 못했다. 그저 스토리만 말하는 건 옳지 않다고 느낀다.”

“장애령의 <경성지련>처럼, 우리는 두 도시 사람의 운명적 관계를 어떤 구성을 찾아 묘사해야 하는지 지금까지도 난 모르겠다. 난 이제 너무 피곤하고 더 이상 찾고 싶지 않다.”허안화는 웃으며 두 손을 들고 투항했다.

“게다가 <반생연>은 장편 이야기다. 난 영화 언어로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줄거리로 표현할 수 있지만 부족했다. 난 어떤 천재들이나 아니면 운이 좋은 사람들이나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상상력은 더 강력하다

2003년 조미가 주연한 <옥관음(玉觀音)>은 허안화가 최초로 대륙 배우를 주연으로 삼은 작품이다.

허안화가 대륙으로 처음 돌아간 건 1972년이었다. 당시 그녀는 이미 홍콩대학 3학년이었고 영국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방문 전 광주로 가서 조부모를 뵈었다.

그녀와 두 명의 여자 동기는 몰래 짐을 꾸렸고 홍콩의 대륙회사로 뛰어가 “남색 광목 바지와 흰색 셔츠를 샀다.” 또 “머리를 묶어 공연하는 것처럼 돌아갔다.” 허안화의 기억에 당시 광주의 거리는 등불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밤의 주강(珠江) 변은 가로등 하나 없이 온통 칠흑 같았다.”

이런 적막감은 허안화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89년 그녀는 자전적 영화 <객도추한>을 찍을 때, 이런 배경을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왔다.

허안화가 두 번재로 대륙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둔 감독이었고 <투분노해>를 해남도를 배경으로 찍었다.

<옥관음>의 투자사는 허안화를 찾아와 원작가 해암(海岩)의 소설을 보여줬다. “난 <옥관음>의 이야기에 감동을 정말 조금 받았다. 이야기가 되는대로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의 극단적인 비극감이 그녀를 움직였다. “너무 참혹했다, 너무 참혹해서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사실이었다.”

TV판 <옥관음>의 열렬한 분위기도 이 동명의 영화 흥행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대륙과 홍콩에서 전부 <옥관음>은 흥행 참패했다.



1985년 <서금은구록>부터 허안화는 끊임없이 대륙의 영화사와 합작했다. 그녀는 점차 대륙 영화사 간의 차이를 깨달았고 대륙과 홍콩의 차이는 더 심했다. 예를 들어 허안화는 영화가 생활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또 대륙 감독처럼 연기자에게 “생활을 체험하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상력이 실제적 생활 체험보다 더 강하다고 믿는다.

허안화가 이잠을 알게 된 건 북경에서 <옥관음> 후반 작업을 할 때였다. 누군가 그녀에게 이잠의 시나리오가 아주 훌륭하다고 추천했다. <공작>의 시나리오를 본 후 허안화는 그와 너무나 같이 일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렇게 소인물의 희노애락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방식을 굉장히 좋아한다. “난 나에게 그가 없는 과격함이 있다고느꼈고, 그래서 그의 과격함이 좋아졌다.”

허안화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큰형과 부인이 나무 수레를 끌다가, 다리를 저는 부인이 갑자기 악랄하게 변하는 장면이다. 본래 아내는 삶에 희망이라고는 없었는데 뜻밖에도 아내에게 여전히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대비에 허안화는 압도됐다.

<이모>를 돌이켜보면 허안화가 제일 먼저 생각했던 건, 라스트 씬에서 이모가 시장에 앉아 만토우를 먹는 장면이다. 허안화는 줄곧 자신의 생활과 ‘이모’ 사이에는 어떤 교차점이 없다고 강조했고 공통된 점은 그저 둘 다 60세 동갑내기 여인의 느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