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권투선수인 진보 (홍금보) 는 마땅한 직업 없이 LA의 경마장을 전전하는 날건달이다. 그는 홍콩에서 건너온 소옥 (장만옥) 과 위장결혼을 하는 대가로 사채업자의 빚을 갚으려 한다. 그러나 소옥의 애인인 피터 (장견정) 가 돈을 갖고 도망치면서 두 사람은 곤란한 지경에 처한다.
대충 이렇게 줄거리를 쓰긴 했는데 <과부신랑 - 過埠新郞: Paper Marriage, 1988> 은 종잡을 수 없는 영화다. 순식간에 불쌍한 처지가 되어버린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코미디인가 하면 킥복싱을 소재로 한 액션영화인가 싶고, 미국으로 이주해 온 홍콩인의 설움을 보여주는가 싶다가도 어느샌가 마약 조직의 검은돈을 둘러싼 쫓고 쫓기는 활극으로 바뀐다.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지 나중에는 멜로의 기운까지 넘실댄다. 수시로 변화무쌍 하는 영화는 매무새가 단정치 못하다. 모든 인과를 초현실적으로 무시하는 홍콩의 액션영화라는 걸 감안해도 평균 이하다. 이 영화가 데뷔작이자 은퇴작이 되어버린 각본가의 가혹한 운명이나 주로 울퉁불퉁한 만듦새를 보여 온 감독 장견정의 경력을 생각하면 딱히 흠잡을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허안화가 연출한 <호월적고사> 의 각본 (뿐 아니라 방육평의 <부자정> 같은 꽤 진지한 영화의 각본가이기도 하다) 을 쓰고 <북경예스마담> 시리즈를 생산해 낸 전력이다. 모두 홍콩 반환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는 영화들이다. 당시의 홍콩 영화계에서 홍콩 반환을 영화의 소재로 다룬 것이 그 혼자만은 아니었지만 장견정은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꾸준한 관심을 보인 편이었다. 심지어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일 년 전에 <마지막 총독님의 보디가드> 라는 노골적인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홍콩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이 주인공인 <과부신랑> 은 그의 공통된 이력을 거슬러 갈 수 있는 영화처럼 보이기는 한다.
<과부신랑> 의 모든 사건은 돈을 통해 돌아간다. 일단 둘의 처량한 꼴이 그렇다. 진보는 경제적으로 무능해서 아내에게 이혼까지 당한 처지에 사채업자의 빚 독촉에 편할 날이 없다. 한 때는 잘 나가던 권투선수였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인간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고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는 실험의 자원자로 근근이 연명하곤 한다. 무작정 미국으로 온 소옥은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돈을 갖고 도망치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다. 위장 결혼으로 돈을 갚으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 진보에게 갖은 구박을 당하는 건 뻔한 일이다. 그런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괴상망측한 실험의 재료가 되며, 사각의 링과 진흙탕에서 피멍이 들도록 얻어맞다가 우연히 돈 가방을 차지하면서 백주의 놀이공원에서 죽을 고생을 한다. 다 그놈의 원수 같은 돈 때문이다. 이민자에게 돈은 생존이 결부된 중요한 문제이긴 할 거다. 소옥이 진흙 레슬링장에서 만신창이가 된 후에 서럽게 울거나 대전료로 받은 돈을 꺼내보며 '돈이다, 돈이다' 라고 혼자 되뇌는 장면은 웃기면서도 찡한 감이 있다. 연출의 공이기 보다는 장만옥의 연기 덕분이다. 마약 조직의 돈 가방이 두 사람에게로 굴러 들어오는 후반부가 정말로 어처구니없지만, 살짝 재미있기도 한 부분이다. 진흙탕에서 구르고 변기 물에 얼굴을 박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던 장만옥은 놀란 토끼 눈으로 돈 가방에 대한 집착을 보이면서 남자들의 거친 싸움에도 절대 주눅 들지 않는다.
장만옥은 <과부신랑> 이 만들어진 88년에만 모두 12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장르와 감독도 다양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왕가위와 <열혈남아> 를 찍은 것이지만 종래의 코미디와 액션영화에서 보여준 귀엽고 발랄한 이미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유금세월>, <달, 별 그리고 태양> 같은 신파 멜로영화에도 연달아 출연한다.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2 - 구룡의 눈> 도 빼놓을 순 없다. 장만옥은 88년을 기점으로 배우로서 어떤 전환점에 선 듯 보인다. 그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금붕 (인재뉴약, 완령옥) 과 허안화 (객도추한) 와의 만남은 좀 더 기다려야 하지만 철저하게 규격화된 영화에서도 미스 홍콩 출신이라는 이미지만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어느 정도 인식시킨다. 또 한 가지.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니 정확한 근거를 댈 수는 없는 일인데, 외모의 변화도 어떤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그 전까지는 늘씬한 다리를 뽐내고 (폴리스 스토리2는 장만옥의 다리를 훑는 시선이 꽤 노골적이다) 단순히 귀엽기만 한 얼굴이었다면 88년에 찍은 영화들에서는 지금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에 근접한 분위기를 조금씩 풍긴다. 그냥 단순 무식하게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비로소 여자 같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전 해에 출연했던 <A계획속집> 이나 <주윤발의 미녀사냥>, <개심귀당귀> 같은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좀 다르다.
홍금보가 주인공인 영화이니만큼 액션의 재미가 클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한데, 생각만큼 그렇지가 않다. 무술감독은 <강시선생> 의 도사로 잘 알려진 임정영과 악역 전문 원화 (元華) 다. 홍금보의 상대는 과묵한 악당으로 익숙한 주비리 (周比利) 와 적위 (狄威). 모두 액션에 있어서만큼은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다. 영화의 액션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홍금보와 주비리가 링에서 한 판 대결을 벌이다 친구가 되는 중반과 홍금보와 적위가 돈 가방을 두고 놀이공원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치고받는 후반부다. 전자가 딱딱 끊어치는 동작 위주라면 후자는 무지막지하게 치고 구르는 홍콩 액션영화의 공식을 집대성한다. 후반부의 액션은 여러 면에서 <폴리스 스토리> 를 빌려온 거 같은데, 맞아도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 홍금보의 맷집은 성룡과 비견된다. 그럼에도, 액션은 다소 미약하다. 단순히 빈도의 문제가 아니라 집중의 부족이다. 홍콩 액션 영화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아무리 다른 요소들이 엉망진창이어도 한 판 벌여야 할 때를 정확하게 잡아낼 줄 안다는 것인데 <과부신랑> 에는 그게 부족하다. 좀 더 액션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싶으면 뚝 자르거나 불필요한 장면을 삽입하고 고속촬영을 남발하면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감이 많다. 특히, 많은 영화에서 등장만으로 가공할 위압감을 주던 적위의 카리스마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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