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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당랑 - 螳螂,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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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 관리의 아들 웨이펑 (강대위) 은 어느 날 황제로부터 청을 반대하고 명나라를 재건하려는 조직의 전모를 알아오라는 명을 받는다. 웨이펑은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이지만 황제의 명령이라 거역할 수가 없는데다 정해진 기간 안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가족을 몰살시키겠다는 치명적인 옵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도중에 웨이펑은 선생을 쫓아내는 기기 (황행수) 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가 반청 조직을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의 손녀다. 때마침 기기의 눈에 들어온 웨이펑은 천씨 가문에 선생으로 잠입하게 된다.


   <당랑 - 螳螂, 1978> 의 초반은 변변한 결투장면 하나 없이 웨이펑과 기기의 기 싸움을 보여주는데 앞으로의 전개를 위한 포석이자 가벼운 몸 풀기와 같다. 쾌활함이 지나쳐 철없어 보이기까지 한 기기는 공부보다 무예에 뜻을 둔 집안의 골칫덩이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혈기왕성한 소녀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던 기기는 웨이펑과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 순한 양이 되고 그가 보통의 선생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이는 둘의 관계가 위장된 스승과 제자, 혹은 서로를 처단해야 하는 적을 넘어 복합적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될 것임을 보여주는 예정된 운명과도 같다. 이건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창때의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꼭 쥔 채로 붓을 들고 있으니 글을 쓰는 실력보다 연정이 먼저 통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안타깝게도 웨이펑은 모르는 짝사랑이다.


   영화는 그때까지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간다. 순전히 드라마로만 긴장감을 이어간다. 정해진 기간 안에 임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웨이펑의 심리적인 압박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당황스러울 만큼 빠른 진전을 보인다. 기기의 할아버지가 웨이펑이 조정에서 보낸 밀사임을 알아채고는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여기에서 손이 귀한 집안의 외동딸인 기기의 성격이 제대로 빛을 발한다. 명조를 재건하려는 가문의 대업 따위야 알 길이 없고 사랑에 눈이 멀어 웨이펑을 죽일 거면 함께 죽여 달라며 막무가내로 떼를 쓴다. 이를 지켜보는 가족은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웨이펑을 살려주는 대신 집안의 사위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게 되고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한 마디로 <당랑> 은 세상물정 모르고 자란 철없는 소녀가 한 남자를 어떻게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넣는가를 보여주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 獨臂刀> 같은 민폐극으로 시작하게 되는데 피해자 (?) 인 웨이펑의 입장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3개월 안에 구체적인 실적을 들고 가야 할 웨이펑으로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진 셈이지만 자신의 운명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며 거의 막판 결투를 위한 분노의 배역에 가깝다.


   웨이펑의 미적지근함은 좀 더 기기의 능동성을 부각하는 이유가 된다. 실제로 영화의 중반까지 기기의 활달함과 황행수라는 배우의 매력은 잘 결합되어 있다. 기기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웨이펑과 절대 살려 보낼 수 없다는 할아버지가 대립하면서 단순히 원하는 것을 갖으려고 떼를 쓰는 소녀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남자를 지키기 위해 가문과의 싸움도 불사하는 낭만적인 여전사로 거듭나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웨이펑에 비해 정해진 순서에 따라 운명을 개척하려는 기기의 침착함과 저돌성은 돋보인다.


   기기를 비롯해 <당랑> 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는 남자들의 싸움에서 빗겨서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게 되는데 거추장스런 존재로 묘사되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남자들에 비해 합리적이다. 기기의 엄마와 고모는 어이없게 남편을 잃은 자신들의 불행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웨이펑과 기기를 살려 보내려다 죽음을 맞게 된다. 할아버지와 며느리, 손녀와 손녀사위가 뒤엉키는 아수라장의 훌륭한 조역일 뿐 아니라 무협영화의 판타지를 비판하는 쪽에서 본다면 남자들의 겉만 번지르르한 대의가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보여줄 수도 있다. 웨이펑의 '양강지기 (쉬운 말로 죽음을 불사하는 남자다움 정도)' 를 위해 희생당해야 하는 한계가 아쉬울 정도. 기기의 엄마로 나오는 이려려 (릴리 리) 는 주로 장철과 유가량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다.


   <당랑> 은 꽤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전통 무기를 선보이는데 역시 돋보이는 것은 창이다. 감독 유가량은 홍콩 무협영화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창은 모든 무기 중에 빠르고 멀리까지 닿을 수 있어서 가장 지독한 무기' 라고 열변을 토한 적이 있을 정도로 자신의 영화에서 창 (과 봉) 을 즐겨 사용해왔다. <당랑> 에서도 마찬가지. 요소요소마다 갖가지 무기가 등장을 하는데 창을 주 무기로 하는 결투는 수적으로도 많을 뿐 아니라 검이나 주먹만을 사용할 때보다 훨씬 더 긴박한 느낌을 주면서 액션 영화의 리듬감을 단순명쾌하게 재현해낸다. 또, 게임에서 스테이지 클리어를 하듯이 단계를 거듭하면서 상대에 따라 적절한 심리전을 벌이는 결투는 '부창부수' 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겨우 영화의 절반가량이 지났을 뿐이다. '당랑' 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내용은 이제 시작이다. 혼자 살아남은 웨이펑은 사마귀를 스승 삼아 절치부심 당랑을 배우며 일체의 특수효과를 사용하지 않은 사마귀의 연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다. 사랑과 명예,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자의 비참한 최후는 장철의 영화처럼 가차 없다. <당랑> 의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결말은 단순히 장르의 공식을 따르는 것에 불과한 수준이지만, 확실히 그런 밑도 끝도 없는 패배의 정서가 홍콩 무협영화를 지탱하는 매력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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