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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반금련(潘金蓮之前世今生 ; Reincarnation of Golden Lotus, 1989)

<반금련지전세금생(潘金蓮之前世今生;Reincarnation of Golden Lotus, 1989)>

감독 : 나탁요(클라라 로)

각본 : 이벽화

주연 : 왕조현, 임준걸, 단립문, 증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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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인 <반금련지전세금생(潘金蓮之前世今生)>에서 알 수 있듯이  <반금련>은 중국의 명대 4개 기서로 유명한 <금병매> 속 여주인공 반금련의 전생과 현생을 다룬 영화이다. <금병매>는 <수호지>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무송이 형수를 죽이는 이야기를 독립시켜 길고 긴 장회소설로 풀어나가고 있는데, 서문경이란 놈팽이가 세 명의 여자 - 금병매란 제목은 이 세 여자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취한 것이고 '금'은 반금련을 가리킨다 - 와 놀아나는 내용이다. 제목을 보면 이 천하의 요부 - 신랑이 있으면서 외간 남자와 놀아났을 뿐 아니라 시동생(무송)을 유혹하고 심지어 외간남자와 남편을 독살하는 - 의 전생과 현생을 다루고 있단다.


영화 <반금련>에는 주목할 여성이 3인 관련되어 있다. 첫째는 당연히 주연인 왕조현이다. 두 번째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맡은 이벽화이다. 소설가이면서 각본가이기도 한 이벽화는, <연지구(胭脂扣)>, <청사(青蛇)>, <진용(秦俑)>, <천도방자(川岛芳子)>, <유승(诱僧; 한국 개봉제목은 라스트 템테이션)> 등의 홍콩영화의 원작가이며 각본가이고, 그 유명한 중국 영화 <패왕별희(霸王别姬)>의 원작자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목할 여성은 누구인가? 바로 감독인 나탁요(클라라 로)이다.


'도대체 나탁요는 어디에 있는 거지? 한 때 홍콩영화의 미래라는 평을 들었고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타기도 했고 그녀의 <추월>이란 영화를 오매불망 보고 싶게 만들었던 그 나탁요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이게 궁금했었고 그러다 완전히 잊어버렸다. 얼마 전 스타티비에서 방영해준 <반금련>을 보기 전까지는. 나탁요로 검색해보니 호주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2000년 <1967년형 시트로엥>으로 부산영화제를 방문해 오동진 기자와 한 인터뷰를, 영어로 한 인터뷰도 찾을 수 있었다. 굉장히 반갑고 안도했다. 한 편 봤을 뿐이지만 나탁요가 좋았고 <반금련>이 좋았으니까.


영화는 왕조현의 목을 들고 저승사자(인 듯) 앞으로 걸어 들어가는 반금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술 석 잔을 주며 다 마시면 모든 기억을 잊고 환생할거란 말에 반금련은 천천히 술을 들이키지만 마지막 잔을 뿌리치고 "복수할 거야"를 처절히 외친다. 현대 중국에서 선옥란으로 환생한 그녀는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영화는 극의 후반까지 반금련의 전생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이게 참 멋지게 표현된다. 이벽화가 각본을 쓴 또 다른 작품 <연지구>에서 유령인 매염방을 통해 과거의 홍콩과 현재의 홍콩이라는 한 도시를 보여준다면 <반금련>은 과거의 반금련과 현재의 서옥련을 통해 같지만 다른 한 여자를 보여준다. 가령 어린 소녀가 옛날 기녀들이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토우 슈즈 끈을 묶는 아름다운 장면(본인은 자신이 뭘 부르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다)이나 성숙미를 풍기는 여인이 되자 간부에게 희롱당할 때 전생의 하녀인 반금련은 주인집 늙은 주인에게 강간당하는 장면 등등. 영화는 그렇게 전생이 되풀이될 비극이라는 점을 암시하면서 천천히 파국을 향해 굴러간다.


한편 간부의 거짓말로 발레리나 신분이 박탈돼 공장노동자로 전락한 선옥련은 같은 공장에 있는 남자에게 순정을 품게 되지만, 이 때의 중국은 바로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 주변인들이 어디 가만둘쏘냐. 눈에 보이는 모든 벽에 빼곡히 대자보가 붙어 있는 황량한 공장에서 사람들에게 끌려나와 화냥년 소리를 들으며 고발당하고 그 남자는 선옥련과의 어떤 관계도 부정한다. <반금련>은 앞서 지적했듯이 시종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영화로 환상적인 분위기가 그 특색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 주인공의 전생은 소설 속 인물이라 실제인물보다 관객에게는 상대적으로 멀리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때 문화대혁명 시기라는 배경이 등장하는 거다(물론 앞서 희롱하는 간부 사건으로도 당시 중국의 공산당 분위기를 보여주긴 하지만). 순간 선옥련은 반금련의 전생을 가진 현재의 '인간'으로 다가오게 되고 봉건질서 하의 반금련의 신세나 현대 중국에서의 선옥련의 신세나 별 다를 바 없고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을 나탁요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문화대혁명 시대는 그 시대 자체만으로 이야기가 되는 것 같다. 워낙 끔찍했고 또 황당무계하고 야만적이고……. 영화와 문학 속에서 자주 접해 이제 익숙하고 나와 상관없는 먼 시대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반금련>에서 또 만나자 다시 끔찍하고 굉장히 음울하고 찍어 누르는 숨 막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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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선옥련은 먼 소도시로 쫓겨나고 홍콩에서 온 관광객 증지위를 만나 결혼, 홍콩으로 이주한다. 지금까지 선옥련을 압박했던 게 문화대혁명이란 중국, 즉 외부상황이었다면 홍콩에서는 외부의 압박이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홍콩에서는 선옥련에게 자신의 제어가 불가능한 내부의 또 다른 자신, 전생의 반금련의 등장이란 시련이 주어진다. 때문에 그전까지 영화가 과거의 반금련을 보여주며 선옥련이 반금련과 같은 전철을 밟는 상황적인 유사점을 통해 자신의 다른 면을 자각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모습을 그리는데 치중했다면, 홍콩에서는 예전 공장에서 좋아했던 남자가 증지위의 운전기사며 절친한 동생으로 등장하고 서문경이 디자이너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그녀의 수면위로 떠오른 반금련을 통제하지 못하고 기억이 끊긴 채 서문경과 동침하게 되고 이제 서옥련은 자신 안에 있는 다른 존재를 어렴풋이 자각하게 되는 거다.


서문경의 등장하자 보는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과거 반금련의 행위가 스크린 속에서 재현되리란 희망을 품게 된다. 이 순간 영화는 왕조현이란 스타를 기용한 상업영화로서의 특색을 보여주려 하지만 지금 보면 안 찍었으면 좋았을, 거의 야하지 않은 침대 장면을 묘사한다.(뭐 89년 당시에 봤다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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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점점 더 서옥련을 더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그러다 내가 이 영화에서 도입부의 저승씬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생에 무송과 서문경이 싸우는 장면이다. 다시 보니 예전만큼 좋은 건 아니지만, 그때는 힘이 철철 넘쳐흐르는 이 장면이 참 좋았었다.


<반금련>에서는 같은 배우들이 전생과 현생의 주요 인물을 맡는데, 오로지 무송만 다르다. 무송만 전생의 배우와 현생의 배우가 다르다. 전생의 반금련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첫사랑인 남자를 시동생뻘로 재회한 서옥련은 저승에서 반금련이 다짐했던 복수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복수상대를 제대로 골랐는지에 대해서는, 나탁요는 무송만 일부러 다른 배우에게 맡겨 모호하게 처리한다. 같은 사람이라면 반금련의 복수는 성공한 셈이지만 그 순간 서옥련은 또 다른 진실을 알게 된다. 쓸쓸하고 쓸쓸하고 허망하고 또 허망하게, 그렇게 서옥련은 사라진다. 마치 환장하게 쓸쓸하던 <연지구>의 매염방의 뒷모습처럼.

 

덧.

이 영화로 왕조현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정확하진 않지만 처음 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된 걸로 기억한다. 왕조현의 연기는 <천녀유혼>과 비교하면 진일보한 모습을 보이지만 <연지구>의 매염방과 비교하면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건 아마 이 둘이 맡았던 캐릭터 차이이기도 할 거다. 둘 다 이면의 진실을 몰랐지만, 매염방은 최소한 자신이 원하는 바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조현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기억도 불분명하다. 때문에 후반으로 갈수록 겁에 질린 모습이 주를 이룬다.

거의 모든 장면에 왕조현이 나온다고 할 수 있는데, 서옥련이 홍콩으로 이주한 뒤에는 옷도 정말 많이 바꿔 입고 나온다. 엔딩 크레딧을 보면 협찬 브랜드가 엄청나다. 그런데도 왕조현은 화장기 없는 노동자로 나오는 장면과 사극 복장의 반금련 모습으로 등장할 때가 세련된 복장으로 등장할 때보다 비교가 불가능하게 아름답다. 분명 미인인데 화장할수록 ‘하지 말지’싶은 희한한 배우라는 걸,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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